윤석열 대통령이 한국전쟁 72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서울 중구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국군 및 유엔군 참전유공자 초청 오찬에서 참전용사들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을 수여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전쟁 72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서울 중구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국군 및 유엔군 참전유공자 초청 오찬에서 참전용사들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을 수여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정치학자인 연세대 국제대학원의 박명림 교수.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여름이었다. 당시 모 대학신문의 학생 기자였던 나는 ‘제주 4·3사건’을 취재하기 위한 특별취재팀의 팀장을 맡았다. 그때 박 교수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를 4·3사건으로 잡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제주도 현지 취재 전 일정을 함께하며 큰 도움을 줬다. 취재 후 집필한 ‘잠들지 않는 남도: 은폐된 진실의 복원을 위하여’라는 특집기사 전반부의 이론적 배경은 박 교수가, 후반부 현지 르포는 내가 썼다. 

이 글은 군사정권 시절 음지에서 쉬쉬하며 지라시 수준에만 머물던 4·3사건이 비로소 제도권으로 진입한 단초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내가 군대를 가고 유학을 떠나면서 잠시 끊어졌다가, 2000년대 초 그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로 재직할 때 다시 이어졌다. 그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확장해 집필한 방대한 책을 내면서 정치학자로서 이미 ‘젊은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장준하, 노능서 등과 함께 마지막 광복군이었던 김준엽(1920~ 2011년) 전 고려대 총장이 서거했을 때, 장문의 추모사를 그에게 부탁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논문과 저서 등을 통해서 그의 학문적 방향, 사상적 탐험의 도정(道程)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느 해 겨울,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예배당을 나서려는데, 바로 옆옆 자리에서 박 교수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형! 교회엔 어쩐 일이세요?” “어? 진짜 오랜만이네. 차 한잔하고 갈까?” 나는 농담을 섞어 물었다. “아니, 천하가 다 아는 빨갱이, 박명림 교수가 크리스천이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물론 그는 ‘시장경제와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 핵심 지탱 요소’라고 단언하는 자유민주주의 옹호론자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더 이상 농담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박 교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유해 발굴 현장을 따라다니며 연구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답사를 다녀오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체가 나뒹구는 죽음의 현장을 갔다 오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야. 며칠 동안 신열에 시달리기도 하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땀범벅이 되어 깬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 고쳐보려고 여기저기 안 다닌 곳이 없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어. 그러다가 신실한 크리스천인 아내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면서 이런 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어. 아내의 인도가 내 영혼의 알 수 없는 고갈, 핍진(逼眞)을 채워 준 거지.” 

박 교수의 신앙 간증을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친다. 다만 그날 이후 내 머리를 계속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아!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에 파견돼 싸우다가 전사한 자국 군인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구나.’ 반세기가 훨씬 지났는데도 참전용사의 유해를 찾아 헤매는 미국 정부의 모습은 감동을 넘어 숭고하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나라 사정은 어떨까? 10여 년 전 모 TV 방송에서 한국전쟁 특집방송을 본 기억이 난다. 이미 70~80대 노인이 된 참전용사들의 평균적인 삶은 비참했다. 당시 일반 참전용사는 매달 9만원, 무공훈장을 받은 이는 15만원의 지원금을 받는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 등 여타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와도 차이가 현격하다. 미국 정부가 상이 군인에게 2017년 기준으로 연평균 1만5000달러(약 1970만원), 캐나다 정부가 2014년 기준으로 저소득층 참전 군인에게 월 2100달러(약 270만원)를 지원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금도 밤에 악몽을 꾼다. 포연이 자욱하고,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내가 총에 맞아 죽는 꿈을 매일 밤 꿔. 가위에 눌렸다가 일어나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는 날도 많아.” 인터뷰에 응한 80대의 한 참전용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은 의족으로 바뀐 전쟁 때 잃어버린 그의 한쪽 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훔쳤다.

참전용사들이 군 복무 중에 전쟁터에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공포 또는 그 와중에 입은 부상 등으로 인해 가지게 되는 심리적인 문제를 참전용사 트라우마 또는 베테랑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둘째, 우울증 그리고 셋째, 외상성 뇌손상(TBI)이다. 

PTSD는 전투와 재난, 폭행 등에서 기인하는 참전용사들에게 가장 흔한 심리적 문제다. PTSD를 경험한 이들은 상상 속에서 혹은 꿈에서 예전의 충격적인 사건을 다시 경험한다. 이런 회상의 단서는 특정한 소리나 냄새일 수도 있고,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원인에서든 그날의 악몽이 현재 일처럼 생생하게 재현된다는 점에서, 당사자에게는 한없이 괴로운 일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연히 예전의 기억을 유발하는 장소나 사람을 피하려 하고, 심지어 옛 사건을 상기시키게 하는 상담 치료를 회피하기도 한다. PTSD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일반적인 대인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참전용사들은 주변 사람과 갈등이 잦고, 직장 생활에도 적응을 잘 하지 못한다. 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결혼하는 비율이 낮았으며, 결혼 후 이혼하는 비율은 높았다. 

우울증도 참전용사들이 흔히 겪는 심리적 문제 중 하나다. 대개는 PTSD를 겪고 난 뒤에 우울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여러 날 지속하는 우울한 기분, 수면과 식습관 변화, 한때 즐겼던 일에 대한 관심 부족 등이 타인과 교류 문제는 물론, 일상적인 삶 자체를 방해한다. PTSD를 겪은 이들은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증을 앓게 될 확률이 세 배 이상 높다고 한다. 

외상성 뇌손상은 폭발이나 폭행 등 뇌가 외부의 힘에 부딪힐 때 받은 충격에 의해 생긴다. 뇌 기능이 일시적으로 손상되거나, 뇌 기능의 일부가 변경되는 등 심각한 부상에 속한다. 겉으로 드러난 뚜렷한 물리적인 징후가 없어, ‘보이지 않는 상처’라고 불린다. 그렇다고 증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나 집중력 저하, 계획이나 판단의 어려움 등, 인지적인 증상이나 짜증이나 분노, 불안 등 정서적인 증상 그리고 두통과 구토, 조정과 균형감 저하 등의 신체적인 증상을 동반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기는 설사 백 년 동안 쓸 일이 없다 해도, 단 하루도 갖추지 않을 수 없다(兵可百年不用 不可一日無備).”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라도 언제든 전쟁은 일어날 수 있으니, 늘 전쟁에 대비하라. 다산의 뜻이 이러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전쟁을 찬양하는 나라가 좋은 나라는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대신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를 홀대하는 나라가 정상 국가일까? 


한국전쟁 참전용사 국가처우 개선해야

한국전쟁 발발 72주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초청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했다. 연평대전 유족, 천안함 장병도 초청했다. 또한 미국에서 전쟁 영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벤치마킹하라고 지시했다. 참전용사를 위한 새로운 제복도 마련했고, 전사자 유해 발굴도 끝까지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잘하는 일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약속이 구두선(口頭禪)에 그쳐선 안 될 것이다. 참전용사 처우에 대한 법률, 그들을 지원할 복지제도, 심리 치료 및 재활 치료 체계를 포함해 시스템 전체를 바꾸는 획기적인 정책 전환의 신기원이 됐으면 한다.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아직도 참전용사 중에는 ‘내면(內面)의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가 많다. 그들이 자신들 ‘마음속의 전쟁’을 온전히 끝낼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