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링컨센터의 ‘에이버리 피셔 홀’은 음반업계의 큰손 데이비드 게펜의 통큰 기부로 2015년 ‘데이비드 게펜 홀’로 개명했다. 사진 링컨센터
뉴욕 링컨센터의 ‘에이버리 피셔 홀’은 음반업계의 큰손 데이비드 게펜의 통큰 기부로 2015년 ‘데이비드 게펜 홀’로 개명했다. 사진 링컨센터

행사장(Venue) 명칭에 기업 이름을 붙이는 ‘네이밍 스폰서십(명명권)’은 스포츠에선 대중화된 비즈니스 모델이다. 미 프로야구(MLB) 밀워키 브루어스는 맥주 회사 밀러쿠어스와 계약을 종료하고 2021년부터 아메리칸 패밀리 인슈어런스와 파트너십을 맺는다. 구장 이름도 ‘밀러 파크’에서 ‘아메리칸 패밀리 파크’로 바뀔 전망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AT&T 파크→오라클 파크), 시애틀 매리너스(세이프코 필드→T-모바일 파크) 홈구장도 신규 계약과 함께 이름이 바뀌었다.

미국 프로 스포츠에서 성사된 최대 명명권 거래는 2008년 시티은행과 야구팀 뉴욕 메츠가 맺은, 20년간 4억달러(약 4470억원) 규모 계약이다. 유럽 명문 축구팀의 구장은 명명권을 신중히 사용한다. 영국 축구팀 아스널과 독일 축구팀 바이에른뮌헨은 경기장을 신축하면서 명명권을 사용해 건설 자금을 조달했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알리안츠 아레나의 이름을 허락했다. 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 같은 명문 구단은 기존 구장의 인지도가 워낙 높아 판매에 따른 손익 계산이 쉽지 않다.

기부 문화가 활성화된 미국은 기업인과 독지가의 기부로 지어진 공연장에 카네기홀, 에이버리 피셔홀, 디즈니홀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게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21세기 들어, 미국 주요 공연장의 운영진은 신축과 리노베이션의 펀딩에 기업을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명명권을 행사한다. 2001년 개관한 필라델피아의 클래식-복합문화공연장 킴멜센터는 2500석 규모의 메인홀 명칭을 네트워크 회사 버라이즌에 1450만달러에 판매했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2023년까지 버라이즌의 이름이 따라붙는다. 킴멜센터는 하부 조직의 여러 공연 공간과 기관을 살라미처럼 나누고 세부 명명권을 세일 중이다. 댈러스 퍼포밍 아트센터는 AT&T에 명명권을 팔면서 세부 시설은 기부자의 이름을 유지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사실상 미국 공연업계 명명권 거래의 표준이 됐다.

클래식계를 깜짝 놀라게 한 명명권 거래는 2015년 3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이뤄졌다.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장으로 유명한 에이버리 피셔홀의 리노베이션에 1억달러 기부 약정을 발표한 레코드 회사 경영자 데이비드 게펜의 뜻에 따라 공연장 명칭을 ‘데이비드 게펜홀’로 개명했다. 5억달러가 소요되는 홀 정비 비용의 2%를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열악한 음향시설로 뉴욕 필의 연주력까지 저하된다는 에이버리 피셔홀에 대한 오랜 비판을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링컨센터의 의지가 명명권 양도 거래로 구체화됐다.

전통적으로 문화 예술 지원에 정부 관여를 당연시한 프랑스에서도 공연장의 명명권 계약이 탄생했다. 파리시는 기존 체육관으로 쓰던 베르시 아레나(Bercy arena)의 용도를 콘서트홀 겸용으로 변경하고 좌석을 2만석으로 증설하면서, 호텔그룹 아코르에 ‘10년 4150만유로(약 530억원)’ 조건으로 명명권을 팔았다. 독일에선 1970년대부터 네덜란드 필립스가 뒤셀도르프에서 홀의 이름을 사용한 아레나를 2011년 미쓰비시 전기가 이어받았다. 런던에선 팝 공연과 실내 스포츠 경기를 수용하는 다목적홀의 명명권을 통신회사 O2가 획득해, 평상시에는 최고 명성의 팝가수들 공연이, 연말에는 남자 테니스 ATP 투어 파이널을 개최한다.

1월 중순, 런던 심포니(LSO)는 숙원 사업인 전용홀 계획의 디자인과 건설 비용을 확정 발표했다. LSO는 오랫동안 상주 공연장인 바비컨센터의 열악한 어쿠스틱으로 신음했고, LSO 예술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사이먼 래틀은 오래전부터 전용홀 신축을 주장했다. 기존 뮤지엄 오브 런던 자리에 지어질 새 홀의 건립비는 2억8800만파운드(약 4200억원)로, 이보다 2년 전에 완공된 함부르크 엘브필하모니의 8억6600만유로(약 1조1000억원)보다 훨씬 싸고, 파리 필하모니의 3억9000만유로(약 5000억원)보다도 저렴한 비용이다.

그러나 LSO가 발표한 홀 건립 계획에는 비용을 충당할 세부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펀딩을 국고로 해결한 엘브필하모니, 파리 필하모니와 달리 LSO 신축홀은 시티 오브 런던 주식회사가 마스터플랜을 주도했다. 우선 런던 금융가를 지탱하는 ‘시티 오브 런던’ 구(區) 소재 기업의 기부가 원활하게 이뤄질지 미지수다. 이미 시티 구는 후원 기업난으로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을 폐지했다. 브렉시트에 골몰하는 영국 정부와 노동당 출신의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이 예산을 신축홀에 배정한다는 계획도 LSO 발표에는 첨부되지 않았다. 그래서 제기되는 대안이 명명권이다.


IBK 기업은행이 투자해 2011년 개관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의 내부. 사진 예술의 전당
IBK 기업은행이 투자해 2011년 개관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의 내부. 사진 예술의 전당

공연장에 외국 기업 이름 붙기도

2017년 한국을 방문한 바비컨센터 운영감독 니컬러스 케니언은 런던 심포니 신축에 자금을 대기 위해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명명권 판매임을 밝혔다. 케니언은 영국 내에 이미 전례가 있음을 입증했다. 잉글랜드 동북부 뉴캐슬과 마주한 위성도시 게이츠헤드(인구 20만명)는 도시 재생을 꾀하면서 2004년 다목적 공연 공간인 세이지 게이츠헤드홀을 준공했다. 당초 7000만파운드(약 1300억원)로 음악당 건립 예산을 잡았는데 뉴캐슬의 소프트웨어 회사 세이지가 상당액을 기부하면서 명명권을 부여 받았다. 케니언은 “런던을 상징하는 공연장 이름 앞에 기업 이름이 붙는다면 커다란 사건이 될 것”이라며 “공공성 수호도 중요하지만, 기업이 관심을 보인다면 그만한 가치를 정부가 보전하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고 명명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PL 축구팀의 인수 사례처럼 런던 부동산과 금융 시장에 투자한 중국과 중동 기업이 LSO 신축홀의 명명권에 우선 달려들 것이다. 영국을 상징하는 오케스트라 전용홀에 외국 기업의 이름이 붙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비컨센터를 중심으로 불거질 것이고, 신축 반대론자들의 강화된 반론도 예상된다. 우리도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 CJ 토월극장처럼 이미 클래식 공연장과 공연 예술 공간에 기업의 이름이 쓰인 사례가 있다. 광화문에 신축을 추진하는 서울시향 전용홀의 펀딩 과정에도 해외의 명명권 추진 과정은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