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성계의 갈채를 받은 ‘팩트풀니스’의 공동 저자 안나 로슬링 뢴룬드(Anna Rosling Ronnlund·44세).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세계 지성계의 갈채를 받은 ‘팩트풀니스’의 공동 저자 안나 로슬링 뢴룬드(Anna Rosling Ronnlund·44세).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언론이 건전한 소식과 합리적인 통계를 내보내도 사람들은 부자의 행태나 끔찍한 재난 같은 센세이셔널한 보도를 찾아냅니다. 언론보다 독자의 두뇌가 나쁜 뉴스를 원하기 때문이죠.”

전 세계 40개국에서 100만 부 팔린 베스트셀러 ‘팩트풀니스(Factfulness)’의 공동 저자 안나 로슬링 뢴룬드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안나 로슬링은 세계적인 스웨덴 보건학자이자 통계학자인 고(故) 한스 로슬링(1948~2017)의 며느리다. 시아버지 한스 로슬링, 남편 올라 로슬링과 함께 펴낸 ‘팩트풀니스’는 지난해 빌 게이츠가 통 크게 미국의 모든 대학 졸업생에게 선물하면서 화제가 됐다.

‘팩트풀니스’는 ‘사실 충실성’이라는 말로, 팩트에 근거한 사고법을 의미한다. 책은 흥미로운 질문지로 시작한다. 극빈층 비율, 기대 수명, 재해 사망자 수, 예방 접종 등 각 분야에서 세상이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묻는 13개의 테스트다. 결과는? 노벨상 수상자, 기업인, 언론인, 정치가 등 엘리트들의 절대다수가 ‘세계는 더 나빠졌다’는 오답을 냈다. 지식이 높고 낮고를 떠나 대중의 평균 정답 비율은 16%였다. 무작위로 찍어서 33%를 맞춘 침팬지보다 낮았다.

사람들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무섭고 폭력적이며 가망 없는 곳으로 인식한다. 통계학과 보건학 권위자인 한스 로슬링, 구글 데이터팀의 책임자였던 올라 로슬링, 구글의 시니어 디자이너로 일한 안나 로슬링…, 세 명의 로슬링 패밀리는 정확한 통계와 비주얼 차트로 무장한 채, 우리가 왜 침팬지보다 못한 인식 수준을 보였는지를 친절하게 증명해낸다. 중요한 것은 세계는 사실 여러 면에서 놀라운 진보를 이뤄냈지만, 우리의 두뇌가 위험하고 부정적인 사건에만 반응하는 탓에 낡은 세계에 머무른다는 것.

‘팩트풀니스’는 출간과 동시에 통계와 심리에 관한 역작으로 갈채를 받았다. ‘옵서버’는 금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편견을 넘어 사실을 밝혀낼 때 인간은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책"이라고 치켜세웠다. 프레임 뉴스와 선별된 통계에 지친 한국 독자들이 ‘사실 충실성’에 갈증을 느끼던 무렵,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안나 로슬링이 방한했다. 그는 눈앞의 뉴스가 아닌 ‘큰 그림을 볼 것’을 강조하며, ‘팩트 중심 사고’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덜어줄 것이라고 했다.


팩트풀니스, 사실 충실성이라는 말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어느 날 남편과 여름 별장인 오두막으로 여행을 떠나던 도중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는 마음챙김센터를 지나게 됐다.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보듯이, 팩트를 정확히 들여다봐야 사고의 힘이 생긴다는 데 착안했다. 세상이 나빠 보이는 건 부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것을 크게 보는 뇌의 본능 탓이다.”

당신 생각에, 뇌의 오해 본능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인가.
“공포 본능, 다급함 본능과 함께 크기 본능이다. 어떤 사건을 볼 때 항상 비교 수치를 함께 봐야 한다. 맥락 없이 하나의 사례만 보는 게 가장 위험하다.”

세계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이분화하는 것도 30년 전의 낡은 틀이라고 했다. 전체 국가를 소득 수준에 따라 1단계부터 4단계까지 나누는 방식은 ‘중간 풀’을 강조하기 위해서인가.
“좀 더 체계적인 분류가 필요했다. 우리는 엘리트 학생은 물론 유엔이나 다보스 포럼에서 만난 각국의 지도자들조차 서양 바깥은 모두 빈곤국이라 생각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세계를 4단계로 나눴다. 1인당 소득 수준이 하루 2달러 미만이면 1단계 국가, 2~8달러는 2단계, 9~32달러는 3단계, 32달러 초과면 4단계 국가로 분류했다. 현재 1단계인 저소득 국가엔 10억 명이, 2~3단계인 중간 소득 국가에 50억 명이, 그리고 한국과 스웨덴을 포함한 4단계 고소득 국가에 10억 인구가 살고 있다.”

안나와 올라 부부는 숫자가 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 시각 자료를 고안했다. ‘달러 스트리트’와 ‘물방울 도표’다. 50개국에서 잠자리, 식사, 이동수단 등을 찍어서 보낸 사진 자료를 4단계 소득 수준에 맞춰 시각적으로 비교 정리한 ‘달러 스트리트’와 각국의 소득과 수명을 그래프화한 물방울 도표를 보면 지구의 현재가 한눈에 보인다. 한국은 일본보다 허약하고 미국보다 건강하며, 이스라엘이나 스페인보다 부유하다.


안나 로슬링이 7월 한국을 찾았다.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안나 로슬링이 7월 한국을 찾았다.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세계를 편견 없이 보고 난 후 무엇을 깨달았나.
“들여다보면 사는 건 다 비슷하다. 사람들은 특정 문화권에 따라 생활방식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편견이다. 소득 수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물방울 도표는 시간의 궤적을 보여준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큰 그림으로 데이터를 보면 그 나라의 발전이 보인다. 새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비상하듯이.”

소득·건강 측면에서 의외였던 나라는.
“칠레가 보건과 교육에서 굉장한 진전을 이뤘다. 내가 놀란 건 엄청난 진보를 이룬 나라가 다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데이터를 통해 세계를 다차원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정치와 미디어가 ‘사실 충실성’을 방해하는 주범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언론은 극적으로 과장된 세계관을 양산하니, 뉴스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조언에 씁쓸해졌다.
“(미소 지으며) 나는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뉴스는 매일의 예외적인 사건을 보도하는 게 일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좋은 뉴스는 특별한 해프닝이 없는 한 뉴스거리가 안 된다. 언론이 건전한 소식과 합리적인 통계를 앞에 내보내도, 사람들은 끔찍한 재난 같은 센세이셔널한 보도를 찾아낼 거다. 언론보다 언론의 소비자가, 소비자의 두뇌가 나쁜 뉴스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에서 더 큰 그림과 팩트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당신은 주로 무엇을 통해 세상을 보나.
“각 나라의 큰 데이터 세트를 본다. 의료, 교육, 실업 등의 통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비교해가면서.”

일반인은 접근이 어렵겠군.
“아니다. 유엔과 세계은행의 시스템에 접속하면 모든 데이터가 공개돼 있다. 생각보다 세계의 큰 그림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나는 그 데이터를 이해하기 쉽게 분류해서 해석의 틀을 만들어주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해마다 경제 불황과 실업이 심각하다는 뉴스를 듣는다. 장기 데이터로 큰 그림을, 뉴스로 작은 그림을 보다 보면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맞다. 언론은 항상 그 시점에, 그 나라 중심의 보도를 하게 마련이다. 시간의 추이와 함께 월드와이드로 보면 사건과 상황의 크기를 읽을 수 있다. 항상 주변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봐야 한다.”

통계를 읽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앞으로 데이터 해석 능력이 글을 읽는 능력만큼 중요해질 거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핵심 직무능력이 될 거다.”

아프리카 극빈층은 20년 안에 역사에서 사라지고 50년 뒤 그들이 유럽에서 난민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환영받을 거라고 썼다. 믿을만한 예측인가.
“정확히 말하면 일어날 수도 있는 기적이다. 1960년대 아시아를 생각해보라. 굶주리고 자연재해에 찌들어있었다. 지금 같은 발전이 있으리라 상상했나? 물론 아시아는 교육열이 높고 지리 조건이 다르다. 하지만 아프리카도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도전은 있지만, 우상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세계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다.”

일단 중간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의 인구 증가는 기업가들에게 중요한 팩트라고 할 수 있겠다.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이다. 4단계 국가들(이름하여 선진국)이 세련된 제품 개발에 몰두하지만, 그 소비 시장은 정체된 10억 인구다. 지금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력이 성장하는 주요 소비층은 1~3단계의 중간 소득과 저소득 국가다. 그들의 수요를 예측해야 한다.”

‘메가트렌드’로 유명한 세계적인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도 ‘힘의 이동’에서 같은 말을 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의 신흥국 시장이 세계 경제의 동력이 될 거라고.
“맞다. 기업은 AI가 목소리로 집안을 관리하는 최첨단 시스템에만 몰두할 때가 아니다. ‘가성비’ 좋은 튼튼한 생리대를 만드는 것에도 신경 써야 한다. 더 넓은 소비 시장을 보라.”

우리가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또 간과했던 게 있을까.
“(미소 지으며) 사실은 초보적인 게 가장 중요하다. 미래라고 하면 로봇만 있는 첨단 사회를 꿈꾸지만, 사실 빈곤 없는 사회라는 것도 중요한 이슈다. 아직도 인구의 10%가 극빈층이고 대개 분쟁 지역에 있다. 그들에게 신발, 자전거, 실내 전등을 공급하고 위생과 교육을 제공하는 게 모두의 풍요로운 미래를 앞당기는 빠른 길이다. 비용도 덜 든다(웃음).”

보통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AI로 자기 직업이 없어질까 두려워한다(웃음).
“유일한 진리는 사회는 안정된 상태 그대로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는 거다. 출판이 자동화되면서 과거 식자공들이 직업을 잃었다. 자동화 물결에 휩쓸렸지만, 그들은 다른 일을 배웠고 새로운 직업이 나타났다. 세상은 완벽할 수도 없고 모두에게 좋을 수도 없다. 리스크도 보지만 극복 방법도 함께 봐야 한다. 유토피아 아니면 디스토피아, 미래는 두 가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테러, 재해, 가난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겐 뭐라고 설명하나.
“테러는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뉴스다. 마치 상어에게 공격당한 것처럼 쇼크를 준다. 하지만 자연재해, 항공기 사고, 테러…, 이 중 연간 총사망자의 1%를 넘는 경우는 없다. 공포 본능을 버리고 실제 사망자 수를 봐야 한다. 재해 사망률도 1970년대와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예측과 구조 시스템의 경이로운 발달 덕분이다. 오히려 뉴스에 안 나올 뿐 예방 가능한 질병, 가령 결핵으로 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가난? 세계 인구의 75%는 저소득도, 고소득도 아닌 중간소득 국가에 산다. 그게 팩트다. 머릿속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실이 들어올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