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 한국에 남았다. 그녀가 그리운 자리, 그녀를 염려하는 자리,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자리에 남았다.
나는 여기 한국에 남았다. 그녀가 그리운 자리, 그녀를 염려하는 자리,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자리에 남았다.

사람이 그리운 것을 지나서, 그 사람과의 지난 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어쩌면 그리움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도착한 후, 잠깐 한국을 방문 중인 친구를 만나 청담동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셨다. 골목을 향해 탁 트인 테라스 자리가 마음에 들었고 대기는 적당한 온도, 그러니까 야외에서 차가운 샴페인으로 시작하여 백포도주로 이어질 만큼의 딱 알맞은 기온이었다.

그녀의 한국어가 일취월장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언어는 영어다. 관계마다 딱 알맞은 온도처럼 적당한 언어가 있다. 그건 우리 사이를 채우는 물질과도 같다. 우리의 관계가 용해되고 변화하고 살아 움직이는 그 자리를 흐르는 말. 미국 생활 중 술이 많이 늘었다면 그녀 탓이다. 나는 주로 그녀와 술을 마셨다. 단둘이 마시는 술.

드물게 폭우가 쏟아지는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낮,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그녀를 만나 테킬라를 마시고 라임을 베어 물고 손등의 소금을 핥았다. 산타바르바라의 와이너리를 온몸이 흐느적거릴 때까지 함께 다녔다. 남편들을 동반하기도 했고 아이들 모두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남미를 떠도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코스타리카의 맨션에서, 멕시코의 리조트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인사동의 이층 술집에서, 이태원의 주점에서, 라스베이거스의 고층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칸의 뒷골목에서, 남프랑스를 가로지르는 요트 안에서, 파리의 생제르맹 교회 근처에서, 우리는 1차, 2차, 3차를 거쳐 수십 차의 술자리를 함께 가졌다.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우리 사이를 흐르는 물질은 아마도 영어와 술 그리고 무수한 웃음과 때로는 눈물이었을 게다. 그녀가 떠난 도시는 언제나 사무치게 외롭다. 4년 전 그녀는 가족을 모두 이끌고 한국에서의 1년살이를 감행했고 메르스 유행이 꺾일 무렵 한국을 떠났다.

누군가 내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는데, 그녀의 경우는 16년 전의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병원을 찾았다가 난소암 가능성을 진단받고 정밀 검사에 들어가게 된 그녀가 무작정 내게 찾아왔다. 우리는 그때까지, 남편과 아이를 사이에 두고 소통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찾아와서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그녀를 사람들이 오가는 쇼핑몰 한복판에서 얼떨결에 끌어안았다. 다행히 오진으로 판명 났지만, 그 이후로도 그녀는 허약한 몸 탓에 잦은 사건을 겪었고 그때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젠가 남미의 어느 크루즈 안에서 새해맞이 파티에 가려 함께 단장하던 중 그녀가 침대에 발라당 누워 중얼거렸다.

“있잖아. 나는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너는 어쩐지 끝까지 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등골을 주욱 훑고 지나가는 차갑고 축축한 감각에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런 말 하지 마. 넌 건강히, 밝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거야.”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걸, 아이를 낳아 품에 안은 순간 구체적으로 알아버렸다. 그리고 내 인생에, 바구니 속 아이처럼 떠내려온 어른들이 있다.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토머스가 테레사를 이와 같이 묘사했고 대학 초년생 시절 나는 어렴풋이 그 느낌을 짐작했다.

아마도 그건, 내가 언제고 아슬아슬해 보였던 엄마를 보며 느꼈던 감정과 맞닿아 있으리라. 엄마 다음으로는 그녀가 내게 그랬다. 표면적으로 우리의 관계는, 엄마처럼 넉넉하고 따스한 그녀의 보살핌을 내가 받고 누리는 관계였음에도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그랬다.

잠을 잘 못 이루는 나는 그녀 곁에만 가면 잠을 잘 잤다.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잘 나누지 못하는 내가 그녀 옆에서는 새근새근 깊은 잠이 들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재우는 사람, 그래서 내가, 내 잠과 내 꿈과 내 노곤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함께 먹이고 재우고 보살피며 지난 16년을 살았다.

그리고 여름의 청담동에서 그녀가 힘겨운 고백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나는 밤새 잠자리를 뒤척였다. 그녀는 돌아갔고 나는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녀를 그리워한다고 하는 말에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을 소환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나이가 들면 그 쌓인 지층들을 헤아려보는 것만으로도 남은 시간을 다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6년 전 코스타리카의 밤의 한복판에서,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니? 네가 무너질까 봐 얼마나 아슬아슬해 했는 줄 알아? 이렇게 잘 살아남아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하다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무너지긴 왜 무너져.”

“난 말이야, 인생에서 별다른 사건 없이 조용히, 내 작은 틀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왔던 사람이거든. 그런데 너를 만나면서 내 세상이 온통 흔들리고 그렇게 확장되었어. 그래서 네게 항상 감사해. 하지만 말이야, 너를 보면서, 네가 겪는 일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네가 무너질까 봐 자꾸 무서워졌어. 옆에서 너를 다 지켜줄 것처럼 붙어 있었지만, 정작 무서웠던 사람은 나였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너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잘 살아남았어. 그런데 말이야, 그런 너를 지켜보는 일이 정말 쉽지는 않았어. 아직도 매일 밤 너를 위해 기도해.”

코스타리카의 밤은 지지 않는 해를 늦도록 붙잡고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해서 침실로 데려갔다. 그날은 내가 그녀를 재울 차례였다. 방문을 닫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슬픔을 전시하지 말 것. 의도치 않았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 말갛게 떠오를 때까지 품어야 하는 것. 너를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남을 것.

그리고 삶은 커다란 턴을 또다시 돌았다. 나는 여기 한국에 남았다. 그녀가 그리운 자리, 그녀를 염려하는 자리,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자리에 남았다. 세월을 관통한 우리의 관계가 감사하면서도 그 세월이 어쩐지 쓸쓸한 나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소멸할 것이고 우리를 흐르던 감사와 웃음과 눈물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그리움마저도.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