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녹두거리에 위치한 ‘박자연 착한음식 이야기, 대학동 테스트 키친’. 소화가 잘되는 ‘3단 토스트’, 자극적이지 않은 ‘즉석떡볶이’가 이 집의 자랑거리다. / 김하늘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 낡은 여행자 숙소에 묵으며 지하 공동 주방에 상비된 무료 오트밀과 팬케이크로 며칠을 났다. 감기라도 걸리면 싸구려 토마토 소스에 물을 부어 끓여 마셨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결국 학업을 다 끝내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모든 재산이 소각된 괴로움과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그는 20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 삶을 겨우 이어 나갔다. 지하 셋방에 쌓여 있는 라면 봉지와 빈 도시락 용기를 발견했을 때, 나는 가슴에 들이치는 커다란 허기에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나는 호텔경영을 공부했지만 이후 대중식당으로 직업의 무대를 바꿨다. 누군가의 가난한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 녹두거리엔 중고 서점과 고시원, 편의점과 고시뷔페(고시생들을 위한 뷔페식 백반집)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녹두거리는 주로 고시생과 지방 출신 사회 초년생들이 방을 얻어 생활하는 곳으로 주변 대학교 학생들도 이곳을 드나든다. 1000원짜리 커피부터 1만5000원짜리 안심스테이크까지, 그들의 주머니 사정을 달래는 저렴한 가격대의 카페와 식당이 주를 이룬다. 가성비로 승부 보는 이곳에서 인근에 분점까지 낸 카페도 있다. 이 카페의 이름은 ‘피그말리온’.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면 어떤 것이든 이뤄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에서 따왔다. 주 고객인 고시생들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북돋기 위함이다.

이 카페는 식혜, 샌드위치, 샐러드와 수프까지 모두 주인이 직접 만든다. 학생들은 다양한 음료와 간단한 스낵으로 목을 축일 뿐 아니라 배를 채우고, 3500원에 불과한 저렴한 가격으로 마음까지 채운다. 뿐만 아니다. 아침에 음료를 주문하면 사이즈업 혜택을 주고, 매달 특정일마다 추첨해 한 달간 총 ‘108명’의 고객들에게 커피를 증정한다. 카페 이름처럼 더 큰 행운을 선물하며, 108배의 간절함으로 보시(布施)해 대학동 수험생들의 꿈을 격려한다.

카페 피그말리온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분식집이 하나 있다. ‘박자연 착한음식 이야기, 대학동 테스트 키친’. 진한 개나리색 때때옷을 입은 이곳은 녹두거리의 신입생이다. 분식집의 주인인 박자연씨는 음식을 평생 공부로 생각하고 수많은 책과 강의로 지식을 쌓았다. 3년간 200곳의 식당에서 일일 도우미로 일하고 어깨 너머로 영업 노하우를 얻으며 배움에 살을 붙였다. 애초부터 분식집 운영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분식집 기존 메뉴를 손봐주러 왔다가 주인과 식재료가 타협되지 않아 티격태격하던 와중에 ‘홧김에’ 가게를 인수했다. 자연주의를 외치는 그녀가 분식집을 한다는 소식에 다들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주변 고시생들은 물론 동네 원주민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박자연씨의 식당에서 파는 3단 토스트는 마가린이나 버터를 쓰지 않는다. 장시간 앉아 있는 수험생들을 위해 소화가 잘되도록 만들었다. / 김하늘

박자연씨의 식당 메뉴판. 인공 첨가물을 넣지 않은, 깔끔한 매운맛이라는 떡볶이 안내판이 눈에 띈다. / 김하늘

자연주의 분식집, 엄마 생각 사무치는 맛

주변 여느 곳과 다름없이 5000원을 넘지 않지만 그 이상의 값어치를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한입에 단골이 된다. 음식을 먹어보면 바로 이해가 간다. 아니 먹어보지 않고 눈으로만 봐도 그렇다. 특별한 구색은 아니지만 메뉴마다 정성이 담겼다. 토스터에 바싹 구운 식빵에 네모 반듯한 지단, 아삭한 양배추와 달콤하고 풋풋한 향의 사과채, 햄과 치즈를 얹어 3단 토스트를 완성한다. 마가린이나 버터는 쓰지 않는다. 장시간 앉아 있는 수험생들을 위해 소화가 잘되도록 만든 것이다. 먹는 이들은 경쾌한 든든함을 얻는다.

떡볶이는 부모님이 농사지어 보내는 고춧가루와 동생이 직접 기른 사과를 갈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떡볶이는 그녀에게 가장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다. 자극적인 맛의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비법을 얻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 된 떡볶이에 식용유를 잔뜩 두르라는 둥, 시판 떡볶이 양념장에 조미료를 더 투하하라는 둥 실망스러운 답만 얻었다. 오기가 생겼다. 현재도 부단히 연구 중이다. 처음엔 외면받다가 점점 집에서 만든 떡볶이 맛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순대도 있다. 역시 다르다. 연잎순대다. 반나절 동안 열이 가해지는 찜기 위 비닐이 영 께름칙해 연잎으로 순대를 덮는다. 곧 이마저도 팔지 않고 연잎밥을 내놓을 예정이다. 무말랭이무침으로 속을 채운 주먹밥과 직접 말린 표고, 집된장으로 끓인 쑥된장국을 함께 낸다. 주먹밥 토핑으로 김가루 혹은 직접 빻은 콩가루를 선택할 수 있다. 아득아득한 무말랭이무침과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양념된 밥, 향긋한 쑥 내음이 넘치는 된장국에 엄마 생각이 절로 난다. 엄마의 맛과 똑 닮아 있지 않더라도, 하나라도 더 깨끗하고 속 편한 음식을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집의 효자 상품은 따로 있다. 전이다. 팔려고 만든 게 아니다. 주인이 먹으려고 테이블에 놓은 김치전을 여학생이 얼마냐 묻길래 허둥지둥하다 2000원에 팔아버렸다. 그 후 소문이 나 고정 메뉴가 됐다. 김장 김치가 다 떨어져 김치전은 접고 부추전으로 대체했다. 따뜻한 기운이 돋아나길 바라는 의미에서 ‘기양초(起陽草·부추의 또 다른 이름)전’이라 이름 붙였다. 강황가루로 노랗게 색까지 내 구미를 확 당긴다. 반응 역시 폭발적이다. 떡볶이를 포함한 모든 메뉴는 절대 미리 만들어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아치면 문을 닫는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양을 만들다가는 제대로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단골들은 주인을 붙잡고 설득한다. 밑지고 장사하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며, 지레 우려하고 가격을 올리라고 성화다. 밤 11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온 학생들로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한 청년은 된장국 한술을 뜨며 말한다.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대학동의 입소문은 모바일 앱인 ‘구동여지도’를 구심점으로 퍼져나간다. ‘구동’은 대학동의 옛 이름 ‘신림9동’에서 따왔다. 주로 고시식당 가격이 어디가 가장 저렴한지, 복삿집이 몇 시에 문을 닫는지 등 수험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 살뜰히 담겨 있다. 앱을 작동시키면 하늘색 화면이 열린다. 종일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공부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고시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개발자의 푸른빛 마음을 담았다. ‘가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 그곳에 길이 있을 수 있어.’ 하늘은 우리 머리 위에 있다. 희망은 손안에 있다. 배고팠던 시절, 나는 그렇게 허기를 달랬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