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한상호 EBS PD는 2008년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후 10년째 시리즈를 발전시켜 오고 있다. 사진 이태경 객원기자
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한상호 EBS PD는 2008년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후 10년째 시리즈를 발전시켜 오고 있다. 사진 이태경 객원기자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쥬라기 공원’을 만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코스타리카 연안의 이슬라 누블라 섬에서 ‘모가지가 길어서’ 한없이 우아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처음 목격했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공룡은 그렇게 호박 화석에 갇힌 모기 피에 운반돼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쥬라기 공원’이 준 문화적 경제적 파장이 얼마나 컸던지, 정부는 ‘쥬라기 공원’ 한 편이 벌어들인 돈이 현대차 150만 대를 수출해 얻은 이익과 같다며 영화 산업 육성을 부르짖기도 했다. 당시 CG(컴퓨터그래픽스) 기술을 이용해 나온 첫 한국 영화는 ‘구미호(1994년)’.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룡과 구미호의 간극은 아메리카 대륙과 한반도의 거리만큼 멀었다.

그로부터 15년 뒤. 드디어 한국 안방에서 공룡의 포효가 들려왔다. 2008년 11월의 어느 날 밤 10시, 나는 EBS가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역작 다큐멘터리를 송출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8000만 년 전 경남 고성군 덕명리. 낮고 그윽한 산야와 드넓은 호숫가에 쿵쿵 대지를 울리며 걷던 타르보사우루스의 발소리를. 네 살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한반도의 토종 공룡’이 태어나던 그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목이 긴 부경고사우루스가 물을 마시고, 약삭빠른 벨로시랩터가 사냥감을 찾아 언덕을 내려오고, 새끼 공룡 ‘점박이’가 어미가 토해낸 고깃덩이를 받아먹는 모습을.

‘쥬라기 공원’을 볼 때와는 다른 종류의 환희와 자부심이 벅차올랐다. 공룡의 낙원을 완벽하게 재현한 남자, 한국의 스필버그가 바로 한상호(50세) EBS PD다. 그는 이후 10년째 공룡과 씨름 중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던 얼룩무늬 타르보사우루스 점박이를 주인공으로 2012년 영화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을 만들어 100만 관객을 모았던 이 집념의 사나이는 최근 두 번째 영화 ‘점박이 2 한반도의 공룡: 새로운 낙원’을 만들었다. ‘점박이 2 한반도의 공룡’에서 점박이는 관찰 대상이 아니라 직접 자기 삶을 ‘말하는’ 공룡으로 성장했다. 오로지 공룡만 출연한 극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유례없는 일.

한상호 감독을 만났다. 10년 동안 그와 협업했던 영화 제작사 드림써치 사무실은 거대한 공룡 구조물과 피겨, 뼈와 일러스트레이션(삽화)이 가득했다. 잘 재단된 코트에 투명 뿔테 안경을 낀 모습이 흡사 영국 도서관의 고고학자 같은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EBS PD로 재직한 23년간 총 세 편의 다큐멘터리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의 주인공 타르보사우루스 ‘점박이’는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한국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소개돼 있다. 사진 이태경 객원기자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의 주인공 타르보사우루스 ‘점박이’는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한국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소개돼 있다. 사진 이태경 객원기자

‘한반도의 공룡’을 봤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 남아 있다. 10년 전에 어떻게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나.
“2008년 다큐프라임을 론칭하면서 ‘사자의 일생’처럼 공룡 시대로 가서 ‘한 공룡의 생로병사’를 다뤄보고 싶었다. 그때까지 자연 다큐멘터리는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를 관찰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반면 나는 ‘사라진 시대’와 ‘사라진 생물’을 영상으로 부활시켜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사실 한반도가 거대 공룡의 낙원이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고성이나 여수 등 남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박물관 앞 바닷가에서 쉽게 공룡 발자국을 볼 수 있다. 한반도는 공룡들의 무도회장이라고 할 정도로 초식공룡과 육식공룡이 많이 어울려 살았다.”

‘한반도의 공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EBS 시청률의 세 배, 100만 부에 달한 ‘한반도의 공룡’ 출판물, 40만 명이 넘게 다녀간 ‘한반도의 공룡 체험전’, 독일 RTL디즈니 방송사에 8만유로라는 당시 최고가로 다큐멘터리 수출, 30여 개국이 넘는 국가가 ‘한반도의 공룡’을 앞다퉈 수입해갔다. 그야말로 킬러 콘텐츠가 탄생한 것이다. 한상호는 그때부터 공룡이 가진 야생의 힘, 이야기의 힘에 끌려들어갔다.

사람들은 왜 공룡에 그렇게 감동했을까.
“갓 태어난 아기 공룡을 ‘점박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일생을 따라갔다. 수많은 위기를 지나 점박이가 마침내 사냥에 성공하자 엄마가 내쫓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아이들이 다 울었다. 자기가 엄마랑 헤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거다. 무정해 보이지만 그게 어쩌면 진정한 교육학적인 가치가 있는 스토리텔링이었던 거다.”

그런데 왜 하필 타르보사우루스인가.
“우리 아이들이 한국의 공룡을 봤으면 했다. 북미엔 티라노사우루스가 인기 있지만, 우리 영토에 거주한 공룡은 타르보사우루스였다. 몽골·중국·러시아 일대에 서식한 육식공룡이다.”

사실 한국의 대표 공룡은 ‘둘리’다. 점박이가 둘리처럼 ‘롱런(장기적으로 흥행하는)’ 캐릭터가 될 수 있을까.
“‘둘리’는 김수정 선생님의 현실적인 가족 이야기다. 세 들어 사는 주제에 주인을 무시하고, 애가 어른에게 곧잘 헛소리도 한다(웃음).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좋아할 만하다. 점박이는 사람들이 좀 더 깊이 감정 이입을 하는 것 같다. 서양 사람은 타자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존재로 생각하며 거리를 둔다. BBC의 공룡 다큐멘터리도 3인칭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야 안전하니까. 그런데 당신은 공룡을 1인칭으로 ‘의인화’했다.
“동양은 전통적으로 도깨비와 함께 놀고 씨름도 했다. 공룡도 동물이니까 감정 이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점박이 2’에서 하고 싶었던 건 영웅의 서사다. 영웅의 탄생과 시련을 보면서 아버지와 아이가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실사처럼 연기하는 공룡·물·불·용암 등의 특수효과, 오케스트레이션, 광대한 자연환경을 CG로 설계하는 데 700명의 스태프가 5년간 매달렸다. ‘점박이 2’는 백악기의 공룡 왕이 된 점박이가 납치된 막내와 다른 꼬마 공룡을 구하기 위해 돌연변이 괴물과 맞서는 이야기다. 아버지 점박이의 부성애와 겁 많은 ‘막내’의 성장기, 초식동물과의 우정이 주를 이룬다.

어쨌든 인간처럼 슬픔과 소외, 분노를 리얼하게 연기하는 페이소스 강한 공룡을 보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도전의 연속이었다. 애니메이터(만화영화의 장면, 즉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공룡이 눈과 입 주위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 연기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모션 캡처를 사용하지 않나. ‘혹성탈출’의 매력적인 침팬지 ‘시저’도 그렇게 창조됐고.
“모션 캡처는 디지털 센서를 배우의 몸에 부착해 그 움직임을 촬영하는 기법이다. 영장류는 가능하지만 공룡은 몸 구조가 달라 모션 캡처가 불가능했다. 결국 영화 ‘미스터 고’에서 작업했던 동물 배우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장면을 사람이 연기해 찍은 후 애니메이터가 그것을 보고 그려 넣었다. 그 작업만 2년이 걸렸다. 한국과는 달리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들은 배우다. 자기 연기를 보면서 자연스러운 표정과 근육을 만들어 낸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곧 개봉될 ‘라이언 킹’ 리메이크 예고편을 보여주었다. 2019년 버전 ‘라이언킹’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동물이 연기하는 사실적인 극영화에 가까웠다. “영화 ‘정글북’이나 ‘혹성탈출’을 보라. 동물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이제 우리 영화도 그렇게 이동해야 할 때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걸 현실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고 상상력만 있으면 이제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의 시대가 왔다.”

그는 “지난 5년간 ‘점박이 2’를 작업한 700명의 애니메이션 스태프가 그 노하우를 쌓았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쥬라기 공원’처럼 사람과 디지털 크리처(생물)를 결합하는 기술도 가능하다.” 잔잔한 그의 눈동자에 일순 섬광이 일었다.

‘쥬라기 공원’처럼 ‘점박이’가 세계적인 공룡 프랜차이즈물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고 싶다. ‘도라에몽’은 30년째 매년 극장판이 나오지 않나. 매년 이익을 거두는 훌륭한 문화 사업이다. ‘점박이’도 벌써 10년째 이어져 왔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매년 이어진다면 그걸 만드는 영상 스태프들은 또 앞으로 10년 이상 일할 곳이 생기는 거다.”

‘한반도의 공룡’ 전에 그는 EBS에서 2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데뷔작인 ‘문자’는 중동 전 지역과 루브르 박물관, 브리티시 뮤지엄을 돌며 쐐기문자에서 알파벳에 이르는 여정을 담았다. 암호와 해독, CG와 미스터리 요소가 가미된 극적인 교양 인문 다큐멘터리로 그는 그해 삼성언론인상을 받았다.

두 번째 ‘마이크로의 세계’에서는 전자현미경을 달아 동영상을 촬영하고 영화 ‘매트릭스’나 자동차 충돌 실험에나 쓰던 초고속 촬영 기법을 사용했다. 당시엔 특수 장비가 없어 렌털 회사에 사정해 빌려 썼다. 덕분에 전에 없던 아름다운 영상이 만들어졌다. 이후 그가 쓴 하이테크놀로지는 점차 방송가에 보편화됐다.

좌절할 때는 언제였나.
“기술적으로 더 표현하고 싶어도 모든 게 다 돈이었다. 2008년 내가 ‘한반도의 공룡’을 만들 때 교육부에서 지원받은 돈이 5억6000만원이었다. 당시 BBC는 180억원 예산으로 ‘공룡 대탐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내 경쟁 상대는 BBC인데, 내가 가진 예산으로는 국내 CG 회사들이 다 고개를 저었다. 그때 지금의 제작사 드림써치가 함께해 보자고 제안해 와서 이후로 죽 협업하고 있다. 다행히 공룡은 부가가치가 큰 사업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동력은 무엇인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 20년을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애니메이터와 CG 아티스트들은 큰 그림 안에서 소모품처럼 사용될 때가 많다. 그런데 전에 없던 일을 하면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거다. 돈은 많이 못 벌어도 함께 모여 꿈을 이뤄 간다는 기쁨이 있다.”

별명이 있나.
“어릴 땐 영감이었다(웃음). 거제도 출신인데 다른 애들은 밖에 나가 소도 키우고 나무도 베는데 난 책 보고 그림만 그렸다. 아버지는 나더러 게으르다고 하셨다(웃음). 나는 내가 이렇게 집중해 한 가지 일을 집요하게 하게 될 줄 몰랐다. 그래서 깨달았다. 아, 사람은 좋아하는 걸 시키면 되는구나(웃음).”

경쟁 상대는 BBC인가.
“세계적인 지향점이 있으면 나아갈 힘이 생기잖나. 지금 경쟁 상대는 디즈니 픽사다. 아직 실력은 부족해도 눈은 거기에 가 있겠다는 거다. 나는 나랑 일했던 사람이 보상받고 잘됐으면 좋겠다.”

어떤 꿈을 꾸고 있나.
“가능하면 계속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거다. 얼마만큼 도약해야 할지, 막막할 만큼 항상 ‘고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지만 미래 테크놀로지의 끝까지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