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 전경.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로 이름난 유명 관광지이지만, 음악인들에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전경.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로 이름난 유명 관광지이지만, 음악인들에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에서는 특별한 운송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바로 수상버스다. ‘비행기’에서 ‘배’라는 이색적인 운송편으로 갈아타 파도의 리듬이 익숙해질 때쯤이면 저 멀리 미지의 세계가 희미하게 펼쳐진다. 수로(水路)에 떠 있는 곤돌라, 인상적인 회랑(回廊)이 있는 팔라초(고대 로마 시대의 대저택) 그리고 도시를 수호하듯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산 마르코 대성당의 종탑까지. 이탈리아 동북부에 있는 베네치아는 낮에는 곤돌라 뱃사공이 들려주는 낭만적인 노래, 해질녘에는 석양이 비추는 운하의 황홀한 모습으로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아름다움이 많은 이를 매료시킨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한 세기 전엔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가 있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바그너, 베르디, 도니체티, 멘델스존, 모차르트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비발디, 르네상스 시대의 몬테베르디까지. 베네치아가 존재했기에 이런 음악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있었기에 이 도시가 이렇게 문화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베네치아는 수 세기 동안 많은 예술가에게 깊은 영감을 나눠 줬다.

지금은 빛바랜 팔라초가 고즈넉하게 관광객을 맞고 있지만, 베네치아가 세계 최고의 상업 도시, 가장 진보한 도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시절도 있었다. 14~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성기엔 세계의 부(富)가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당시 이 지역은 지중해 패권 장악의 중심지였던 데다, 동서양 문물이 교차하는 교역로라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또 당시로는 첨단기술이었던 금·은·철·유리 세공 기술의 중심지이자 금융의 중심지로서도 유럽 대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경제 활동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엄청난 부 덕분에 겨우 물고기 낚시 정도만 가능했던 척박한 석호에는 눈부신 궁전과 사원 같은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었고, 곧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어 도시에 예술적 영혼을 가득 불어넣었다.

음악사에서 베네치아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대단하다. 다성음악과 함께 화성음악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왼손으로는 악보에 쓰인 대로 저음 연주를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즉석에서 화음을 반주하는 것)가 바로 베네치아 악파 음악가에 의해 발전됐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여 다양한 악기로 다른 멜로디를 연주하며 화음을 만들어 낸다는, 어쩌면 오늘날에는 당연한 연주의 의미가 1500년대 베네치아 악파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만약 베네치아 악파가 없었다면, 이후 활동한 바흐, 모차르트 음악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이들이 즐겨 듣는 K-팝까지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또 베네치아는 세계 문물이 교차한 곳답게 예술적인 분위기도 자유로웠다. 덕분에 이곳의 음악은 당시 보통 음악과 다르게 종교에만 얽매이지 않았고,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세속 음악이 자연스레 발달했다. 이는 200년 후 베네치아에 ‘오페라의 황금기’라는 음악적 선물로 되돌아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라 페니체’ 극장은 1792년 개관한 이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라 페니체’ 극장은 1792년 개관한 이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베네치아 음악의 산실 ‘라 페니체’ 극장

라 페니체(La Fenice) 오페라 극장을 빼놓고는 베네치아 음악을 말할 수 없다. 이 극장은 1774년 화재로 전소된 산 베네데토 오페라 극장을 대신해 1792년 지어졌다. 화재를 겪었음에도 굳건히 재건된 극장의 역사를 말해주기 위해 이탈리아말로 불사조를 뜻하는 ‘라 페니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초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극장으로 개관됐다. 공연 작품 수와 질에서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비기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앞서는 세계적 공연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로시니, 마이어베어, 벨리니, 도니체티 등 전설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이 앞다퉈 이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초연했다. 또 이곳의 음향을 매우 선호했던 베르디가 ‘에르나니(1844)’ ‘아띨라(1846)’ ‘리골레토(1851)’ ‘라 트라비아타(1853)’ ‘시몬 보카네스라(1857)’ 같은 자신의 주옥같은 명작을 이곳에서 성황리에 초연했다. 이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루치아노 베리오, 벤저민 브리튼, 피에르 불레즈 등 다 열거할 수 없는 근·현대 수많은 음악가가 이 극장을 거쳐 갔다. 오페라 팬에게 라 페니체 극장은 마치 성지와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도 베네치아를 자주 방문하지는 못해도 우수를 머금은 작품들로 이 도시를 추억하고 있다. 특히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歌) 곡집’에 수록된 4곡의 ‘베네치다 곤돌라의 노래(Venetianische Goldellieder)’를 즐겨 연주한다. 1830년 베네치아를 방문했던 멘델스존이 도시에 매료돼 자신의 ‘무언가 곡집’에 스케치하듯 감성을 담아낸 작품이다. 뱃사공이 젓는 노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반주에 우수에 가득 찬 노래가 잘 어우러진다. 또 리스트가 베네치아와 나폴리 여행에서 영감받아 작곡한 피아노 작품집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중 ‘베네치아와 나폴리(Venezia e Napoli)’ 편도 음악가들이 자주 연주한다. 서정적이고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베네치아 곤돌라 뱃사공의 노래와 열정적인 리듬의 나폴리풍 탈란텔라 춤곡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독자들도 들어보시길 권한다. 지중해 내음이 가득한 베네치아의 바람이 코끝에 스쳐가듯 음악이 울려퍼지길 기대해본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펠릭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의
‘무언가(Lieder ohne Worte)’
베네치아 배경의 명반들

‘무언가’ 중 Op.30 No.6 ‘베네치아 곤돌라의 노래’다. 안개에 휩싸인 새벽녘 베네치아를 노래하는 듯한 은밀하고 조용한 반주에 이별을 추억하는 듯한 심연을 울리는 멜로디가 아름답다. ‘가사가 없는 가곡’이라는 뜻의 무언가가 암시하는 것처럼 가사 없이도 한 음 한 음 멜로디를 통해 퍼져나오는 감정이 마음에 스며드는 듯하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아리아 ‘축배의 노래’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베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다.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1853년 초연됐으며 1948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처음 공연된 오페라 작품이기도 하다. ‘라 트라비아타’를 연주한 수많은 명음반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 작품이 초연된 라 페니체 극장 배경의 DVD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