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는가의 문제다.
인생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는가의 문제다.

요새 들어 가끔 떠올리는 장면 중 하나는, 20대 후반 많이 좋아했던 한 남자(마흔 중반까지 살아보니,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손에 꼽을 수 있는지 알겠다)가 서른을 맞이하며 휘청거렸던 일이다. 그는 곧 서른을 맞이할 거라며, 삶의 절정이 끝나버린 양 불안한 마음을 내게 호소했다.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했지만, 나는 그때 크게 공감하진 못했다. 인위적인 시간의 가름에 특별한 감상을 덧붙이는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몇 년 후 나도 곧 서른이 됐지만 그때도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똑같이 지나가는 한 해였을 뿐 의미를 부여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까지의 내게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지만 특별히 좌절할 것도 없는, 그럭저럭 무난한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아쉬울 것도 없었고 후회나 미련이 남는 것도 없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한꺼번에 미뤄둔 회한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지만 말이다.


아이 키우며 내가 지워진 시간

마흔이 넘어가면서 나는 아주 크게 휘청거렸다. 빼먹고 지나간 서른앓이마저 함께 치르는 기분이었다. 마흔이 넘어가면서야 알았다. 별일 없이 지나왔던 지난 시절이 알고 보니 무디게 살아진 덕택이었음을. 이십 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사랑했던 그 남자는 서른이 되기 전 나와 함께 사는 미래에 대해 좀 더 자주 이야기를 꺼내곤 했는데, 그중에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우리가 만일 아이를 낳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아이를 낳게 될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았고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헤어졌고 나는 얼마 뒤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나는 결혼 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임신했고 2년 만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20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연인은 여전히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에 관한 후회는 없어 보인다.

삼십대는 내게 온통 아이를 키우며 사는 기간이었다. 행복했지만 내가 지워지고 스러지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며칠 전 첫째 딸아이에게 말했다.

“행복한 노예 생활이었어.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유일하게 후회할 수 없고 후회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해. 어쩌면 몰라서 시작해서 감사하는 일이기도 하고. 알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야.”

아이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노예 생활이었다는 말이 와닿는다고 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중학생인 동생이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하면 엄마는 떠돌며 살 계획이라고. 고등학생인 딸이 말했다.

“나는 엄마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게 왜 이렇게 후련하지?”

아이는 세상의 숱한 행복 속에서 내 행복이 길을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나의 행복이 오직 엄마로서의 행복에 머물게 될까 근심한다. 노예로서 살지 않으리라 말하며 기운차게 일어서는, 해방된 개인으로서의 엄마이기를 바라고 있다. 어느새 벌써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엄마의 딸로 남고 싶은 안락함보다 더 커져 버린 까닭이기도 하리라. 아이는 혼자 남을 나의 고독을 미리 염려하고 가슴 아파한다.

고독이란 삶의 건강을 적절히 보장해주는 일이라고 설명해줘도 엄마가 자신의 부재 후 맞이할 고독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운 존재인가 보다. 아이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미안해지는 게, 내가 그들을 염려하는 것보다 그들이 나를 더 염려한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다. 그나마 나의 무심함은 그들에게 축복이었을까. 아이의 성적표가 나와도 확인조차 제때 안 하는 나를 뒤늦게 깨닫고 미안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에도 중간 학기 정산 성적표가 나왔는데, 여행 중이라 미처 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확인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니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엄마가 나한테 말했지?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난 그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지금이 행복하고 미래가 두렵지 않아. 무얼 하든 나는 나대로 잘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남의 평가에 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 성적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건 어릴 적부터 엄마랑 아빠가 보여준 느긋한 반응 덕분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엄마의 즐거운 시간을 내 성적 때문에 일부러 쪼개지 않아서 좋아. 요새 친구들 보면서 느낀 건데, 자식의 존재를 본인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 밑에 자라지 않은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해. 난 누가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 같은 걸 크게 느끼지 않아. 다만 옆에서 자꾸 불안해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좀 더 무언가를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가끔은 그게 너무 버거워. 피곤할 때도 있어. 그들과 내가 아주 다르다는 기분이 자주 들기도 해. 거리감을 느끼고 때로는 외롭기도 해.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보다 근본적인 고독감을 딸에게 설명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만큼은 다 하는 것이 네 마음의 빚을 털어내는 데 좋을 거야. 하지만 네 존재를 그들 혹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유독 외로운 사람이 있는데, 그건 네 잘못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의 탓도 아니야. 어쩌면 네 친구들도 각별히 외롭다고 느끼고 있을 거야. 희망이 있다면, 자신의 고독을 잘 알고 파악하고 다룰 줄 알게 되면, 비슷한 고독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더욱더 잘 알아볼 수 있게 돼. 사람은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고독을 가진 사람을 만나려고 삶의 숱한 요구를 수행하며 사는지도 몰라. 비록 완수는 하지 못해도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고독을 좀 더 잘 알게 돼. 그리고 자신의 고독이 어떤 건지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면 말이야,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 덜 버겁게 느껴져. 네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하길 엄마가 원하는 건 그 때문이야. 더 넓은 가능성 속에서 더 많은 만남과 깨달음을 얻게 될 테니까. 네가 알게 됐으면 해. 네 고독을 나눌 수 있는 관계만큼 매혹적인 게 없고 또 자신의 고독이 어떤 성질인지 알게 되는 것만큼 막강한 건 없거든.”

아이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나를 꼭 껴안으며, “난 엄마의 대답이 정말 좋아. 엄마는 나를 잘 아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이런 애매한 대답을 해도, 내 대답을 좋아해 주는 너를 만난 건 내 노예 생활에 가장 큰 보답이야. 고마워. 엄마의 존재를 다 해서,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우리는 새벽 세 시가 넘어가도록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내일 아침 학교에 가야 하는데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고독과 아이의 고독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삶은 끊임없이 성찰하고 점검해야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어릴 적 느꼈던 것만큼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한대로 이어질 것만 같았던 시간이 돌이켜보니 눈 깜짝할 새였다. 지워진 기억도 많아서 가끔은 그 모든 날은 어디로 흘러가버린 걸까, 서글픈 감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서른을 넘어서 느꼈던, 청춘이 지났다는 실감보다 더욱 뼈저린, 삶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인생은 결국, 제한된 시간 동안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는가의 문제로 수렴된다.

그리고 가치는 고정돼선 안 된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점검해야 한다. 고독의 연대와 함께하는 고독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되 적절한 온도로 감싸주는 양수처럼 평온하다. 고독하되 함께하는 고독들은 별처럼 반짝인다. 나는 적어도 나의 딸과 나의 고독에서 그 반짝임을 느낀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