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엄마가 된다는 건, 그저 한 생명을 낳아서 키우는 것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다.
여자에게 엄마가 된다는 건, 그저 한 생명을 낳아서 키우는 것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다.

고등학교 때였나, 엄마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별다른 대화 없이 내릴 정류장만 가늠하고 있다가 문득 엄마의 시선이 한자리에 박혀 있는 것을 느꼈다. 앞자리의 연인들.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모습. 상대방의 들고 나가는 숨결마저도 감미로워 보이는, 온통 서로에게 감각이 집중된 그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사람 무안하게.”

엄마는 내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대답하셨다. 눈빛에는 감정 몰입 반, 부러움 반. 엄마의 눈이 언제 저렇게 빛났었나 싶을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쟤들은 참 좋겠다. 난 저런 거 한 번도 못 해봤는데.”

나는 속으로, 사춘기 여고생 딸을 두고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에 대한 연민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냥 옆자리에 놓인, 여전히 곱고 보드라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엄마 나이는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종종 나를 붙잡고 칭얼거렸다. 외롭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그 말은, 지금 생각해 보니, 연애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여자에게 엄마가 된다는 건, 그저 한 생명을 낳아서 키우는 것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다. 더 이상 자유롭게 유혹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상대방을 찾아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규정짓는 행위다. 물론 남자에게 아빠가 된다는 것 또한 그러하겠지만, 그 의미심장함에 있어 엄마처럼 육체로 각인되고 즉각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한 말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두 살 터울도 나지 않는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나에게,

“지금은 세상과 바꿀 만큼 예뻐 보이겠지만, 아홉 살 정도만 넘어 봐. 예전 같지 않을 걸. 항상 예쁜 것만도 아닐 거야. 온통 애들만 보이는 것도 결국 지나간다. 슬슬 답답해지기도 하고 딴생각도 날 거야.”

그때는 도무지 엄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콕 집어서 말한 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첫애가 한국 나이로 치면 열 살, 둘째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내가 기억하는, 두 여고생과 남자 중학생의 엄마였던 그녀는 그때 마흔이 조금 못 되었었다. 그리고 당시는 몰랐지만, 엄마는 나름 예뻤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피부도 고왔고 몸매도 예뻤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어느덧 같은 여성의 시선을 입고 엄마의 몸을 되돌아보니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아빠의 지나친 간섭 탓에 화장도 립스틱 하나로 끝내야 했던 그녀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사서 신었다고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가만, 그때 엄마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세상에, 서른이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내 인생 가장 예뻤던 때가 바로 스물아홉, 서른이었다. 엄마는 눈부시게 빛나던 20대를 엄마가 되는 일로 시작했고, 그 뒤로는 수입의 대부분을 시골 본가에 보내야 하는 열네 살 많은 남편의 숨 막히는 간섭 속에서 살아냈다. 그녀에게 있어, 결혼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경험, 아니 더 나아가 트라우마에 가까웠을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며 자란 부잣집의 영민한 막내딸에게 젊은 날의 풋사랑은 그 값이 터무니없었다. 임신을 했고 결혼의 대가로 가족을 등져야 했고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엄마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연애를 시작했던 둘째 딸이 참 못마땅하셨다. 두고두고, 다양한 남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한 남자만 사귀는 한심한 딸을 나무라고는 했다. 나도 딸들의 엄마가 되니 좀 이해가 간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남자가 있는데, 결혼하고 나면 어쩌면 끝일 텐데, 어쩌자고 저렇게 한 남자만 붙잡고 있는 걸까. 이제야 엄마 마음이 이해가 간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네가 얼마나 특별한 아이였는지 너는 알기는 했니. 집에 불이 나서 모두 도망갔을 때 혼자 남아 태연히 대처하던 아이였고, 집 안에 식칼을 든 빚쟁이 난봉꾼이 잠입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꾸짖어서 내보냈어. 고작 열 살 좀 넘긴 나이에 말이야. 너도 알잖아. 너는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일어서게 했잖니. 그 정도가 뭐 그리 대단하냐며, 그런 것쯤은 다 네가 나중에 이뤄줄 수 있다고. 내가 모조리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강하고 빛나는 너를 바라보는 것으로 난 살아남을 수 있었어.”

나는 그제야 엄마에게 고백했다.

“엄마, 그건 내가 영웅인 체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사실 그렇게 대단한 아이도 아니었고, 속으로는 그저 남들처럼 되고 싶어 안달인 어린아이였을 뿐이라고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제일 첫 번째 기억이 뭔지 아세요? 어디론가 도망가는 기억이에요. 엄마는 그거 알아요? 내가 받았던 건 언제나 지독한 멸시 아니면 과장된 찬사였어요. 그게 얼마나 무섭고 아슬아슬한지 아세요? 얼마나 외로웠는데, 왜 삶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까, 얼마나 원망스러웠는데.”

때때로 나는 아주 멀리 도망쳐서, 세상 끝에 잠시 머무는 기분이다. 이 낙원 속에 엄마를 초대했지만 그녀는 결코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신 내게 함께 파멸하기를 요구했다. 그녀가 저질렀던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이, 내 인생을 다 망쳐놓겠다고 울부짖던 얼굴이 아직도 조금 아프다. 그건 내 상처가 아픈 게 아니라, 그녀의 존재가 내 안에서 너무 아픈 까닭이다. 아마도 내 인생, 그토록 사랑해본 적이 없을 만큼 애달프게 사랑했던 누군가로부터, ‘어쩔 수 없이 너를 파괴하고 마는구나’라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증오는 가끔, 가장 큰 희망에 쏟아진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희망을 저버리는 순간, 그녀의 가장 큰 증오를 떠안았다. 물론 이마저도 지나간 일이다. 더 슬픈 건, 지금 그녀가 내게 동정을 바란다는 것이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보듬을 수 없는 엄마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데, 더 이상 보듬을 수가 없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다. 그 절망이 너무 내게 가까워서 두려운 까닭일 거다. 내 행복은 그리 굳건한 것이 못 되며 나 역시 이곳의 삶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아직 어지러운 까닭일 거다. 이제, 내 몸이 거부한다. 그녀의 눈빛,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말투, 모든 것이 피로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그녀는 내게 실패의 상징처럼 남아버린 것은 아닐까. 내가 그녀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두렵기 때문일 게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토록 강건하고 찬란한 외양을 덧입었던 그날들에서, 나도 조금은 특별했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차피 내 삶도 별 의미 없이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너무 당연한 진실 앞에 비로소 눈을 뜬 기분이다. 덕분에 인색해졌다. 물론 이 또한 지나가서 어느 순간, 고통의 경계마저 희미해질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즈음이면 나는, 초라한 모습으로라도 그녀를 보듬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고 싶었는데, 그저 고요히 잊힌 삶을 살고 싶었는데, 내 안의 그녀가 자꾸 투정을 부리네요. 달래고 또 달래다가 이제는 그냥 막막하기만 하지요.”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