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도 그룹 B에 288GTO를 투입하려 했지만, 결국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사진 페라리
페라리도 그룹 B에 288GTO를 투입하려 했지만, 결국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사진 페라리

자율주행 시대가 오기까지 자동차 업계는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르며 발전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모터스포츠와 전쟁이다.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자동차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금 우리가 누리는 편리한 기술들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완성된 것이 많다.

자동차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그룹 B’라는 모터스포츠 카테고리가 있다. 그룹 B는 현재 현대자동차가 뛰고 있는 WRC의 한 카테고리로 인간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198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레이스다. 자동차 메이커들도 미치고, 자동차도 미치고, 관람객을 포함한 그룹 B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고출력에 중독돼 미쳐 있던 시절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동차 회사들이 기술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이 때문에 모터스포츠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승을 위해 검증도 안 된 위험한 기술들이 등장하고 이런 기술을 활용한 레이스에 출전하는 드라이버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정도로 치부될 정도였다.

1955년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300SL 경주차가 관람석을 덮치며 드라이버를 포함해 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이후에도 모터스포츠 경주는 매년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흔했다. 안전보다는 기술력 향상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WRC for boys, Group B was for men (WRC는 소년들의 것, 그룹 B는 남자들의 것).’

WRC 그룹 B와 WRC 그룹 A(1986년 그룹B 폐지 후 생긴 카테고리)에서 챔피언을 지낸 WRC의 전설 유하 칸쿠넨이 한 유명한 말이다. 1983년 출범한 그룹 B는 연간 250대의 생산량만 맞추면 출전할 수 있는 카테고리였는데 자동차 메이커들은 여기에 자신들이 가진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했다.

그룹 B를 통해 성공을 거둔 자동차 메이커로는 사륜구동을 들고나온 아우디를 비롯해 트윈차저 엔진(터보와 수퍼차저를 함께 사용하는 엔진)을 들고 나온 란치아, B 세그먼트의 소형 해치백인 205를 출전시킨 푸조, 경량 터보 해치백을 투입한 르노 등이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챔피언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첫해인 1983년은 WRC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해다. 그룹 B가 출범하자 터보엔진을 기본으로 갖춘 경주차의 출력은 400마력을 웃돌기 시작했고, 아우디는 1983년 높은 출력을 컨트롤하기 위해 콰트로 시스템(사륜구동)을 처음 레이스에 선보였다. 레이스에 사륜구동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기존 WRC 명문 팀인 란치아와 피아트 등은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높은 출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룹 B의 인기가 높아지자 페라리(288GTO) 와 포르쉐(959)도 출전을 위한 모델을 개발했고, 1984년에는 포드가 RS200을 투입했다.

출력 경쟁이 극을 향해 달리던 1984년. 이미 경주차의 출력은 450마력을 넘어가기 시작했고 자동차 메이커들의 출력 경쟁은 심화하기 시작했다. 1984년과 1985년은 아우디와 푸조가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지나친 출력 탓에 직선에서는 똑바로 주행할 수 있는 차가 거의 없었으며, 드라이버들은 살얼음판 같은 레이스를 운용해야 했다. 오죽하면 ‘똑바로 가장 멀리 가는 자가 우승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후륜구동 경주차 마지막 우승자인 란치아는 1985년 시즌 중반에 그룹 B를 파국으로 몰고 갈 델타 S4를 공개하며 챔피언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공차 중량이 900㎏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란치아 델타 S4는 공식적으로 650마력의 출력을 냈지만 연구소에서 개발할 때 기록한 최고 출력은 5바에서(과급 엔진의 과급 압력으로 21세기에 등장한 양산형 트윈 스크롤 터보 엔진이 대략 1바 정도) 1500마력에 육박했다.

그러나 이 출력은 어디까지나 추정치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계측장비가 없어 엔지니어들의 계산에 의해 기록된 수치고 대부분의 메이커들이 보안상의 이유로 출력을 하향 발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장된 것은 아니다.


푸조는 205 T16으로 1985년, 1986년 두 차례 그룹 B를 석권했다. 사진 황욱익
푸조는 205 T16으로 1985년, 1986년 두 차례 그룹 B를 석권했다. 사진 황욱익
비극을 몰고온 델타 S4의 트윈차저 시스템은 2000년대 중반 이후에나 상용화됐다. 사진 황욱익
비극을 몰고온 델타 S4의 트윈차저 시스템은 2000년대 중반 이후에나 상용화됐다. 사진 황욱익

비극의 시작과 그룹 B의 종말

1986년은 WRC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 일어난 해다. 과도한 출력 경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자동차 메이커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기 가득한 그룹 B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많은 모터스포츠였으며, 이 때문에 현장을 찾는 갤러리의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졌다. 안전에 대한 의식도 부족하고, 랠리 경기 특성상 일반도로 구간이 많다 보니 구름떼처럼 몰린 관중을 통제할 시스템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1986년 첫 사망 사고는 3라운드인 포르투갈 랠리에서 발생했다. 요하킴 산토스가 몰던 포드 RS200이 완만한 좌측 코너 구간에서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관중석을 덮쳤다. 부상 31명에 사망 3명으로 WRC가 출범한 이래 가장 큰 사고였다.

다행히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는 목숨을 건졌지만 필요 이상의 출력 경쟁에 지친 아우디와 포드는 랠리 포르투갈 사고를 계기로 WRC를 떠나게 된다.

같은 해 5월 1일 코르시카에서 열린 프랑스 랠리 투르드코스(Tour de corse) 직전까지 란치아의 헨리 토이보넨은 그룹 B 경주차의 안정성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비포장도로가 아닌 타막(아스팔트)에서 펼쳐지는 경기인 만큼 고출력을 감당하기 위해 드라이버 스트레스가 더욱 높아진다는 점도 주장했다.

하지만 란치아 입장에서는 개막전 우승 이후 2승을 노릴 기회가 프랑스 랠리였다. 아우디와 포드가 빠지긴 했지만 개막전 이후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던 란치아에 프랑스 랠리는 시즌 챔피언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토이보넨의 사고는 둘째 날인 5월 2일 SS18 7㎞ 부근의 산악 구간에서 발생했다. 좌측 코너를 돌던 토이보넨의 란치아 델타 S4 경주차가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낭떠러지 아래로 굴렀고 나무와 충돌하면서 화재가 발생해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가 차 안에 갇혀 사망했다.

이 사고로 화끈하고 열정적이었으며 광기가 가득했던 그룹 B는 폐지되고 만다. 당시 그룹 B를 주관했던 피사(FISA·국제 자동차 연맹의 전신)는 그룹 B보다 훨씬 과격한 무제한급 그룹 S를 준비했지만 이 역시도 함께 폐지된다.

그룹 B는 자동차 산업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이야 웬만한 차에서 선택할 수 있는 사륜구동의 영역이 과거 험로 주파를 위한 생존성에서 주행 안정성으로 확대됐다. 란치아가 사용했던 트윈차저 엔진(터보와 수퍼차저를 같이 사용하는 엔진)은 지속적인 연구 끝에 2000년대 중반 양산에 성공해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트윈차저 엔진은 현재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트윈 스크롤 터보의 조상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