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은 종종 유용하다. 일단 적은 비용으로 눈앞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복잡해질 수 있는 상황을 몇 마디 말로 심플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경제적인 방법인가. 이때 적은 비용이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뜻한다. 흔히 진실이나 진심이라 말하는 것들인데, 자신만 보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존재감 있는 위험요소는 아니다. 거짓말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외려 거짓말의 유용함을 뒷받침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인즉 자기 자신만 따돌리면 누구도 이 거짓을 의심하고 추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롭기까지 한 삶의 기술을 도대체 누가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나도 거짓말을 한다. 그것도 자주. 작가가 보내온 원고를 읽고 느낀 것 이상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있고 더러는 느끼지 않은 것을 느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슬프지 않으면서 너무 슬프다고 말하거나 좋아 죽겠으면서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그냥 관습이자 규칙 같은 거다. 의문을 품는 순간 모두가 피곤해지는,그리하여 누구도 진의를 궁금해하지 않는,진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통해 숨겨지는 진실의 대부분은 불편한 진실이다. 지불해야 할 대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없고 누구도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불행이라면, 인간 몸의 모든 근육이 그렇듯 진실을 말하기 위해 대가를 감내하는 용기 또한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퇴화한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인간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은 별로 진실하지 못한 나 자신의 최후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이방인’은 진실한 인간의 최후에 대한 소설이다. 뫼르소는 필요 이상으로 진실한 인간이고 사실은 진실밖에 없는 인간이기도 하다. 엔딩은 사형수가 된 뫼르소가 최후의 진심을 전하는 장면인데, 사형수의 그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긍정적이어서 우리를 조금 당황시킨다. 이토록 긍정적인 표현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말했듯이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진실한 그가 왜 사형수가 되었냐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재판은 엄마의 죽음 이후 뫼르소가 보인 행동이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식의 태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는 데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그가 유죄임을 논증하는 자리에서 그는 여러 차례 거짓말을 할 것을 요구받는다. 거짓을 말하면 그의 죄는 감형될 수 있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의 죄는 가중된다. 그가 사는 곳은 진실을 거부하는 뻔한 거짓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뻔한 거짓말이지 불편한 진실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에 맞선 이방인

대개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변한다. 한 인물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장애물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 그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한다. 뫼르소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엄마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 해도.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데서 시작한 이야기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소식을 듣기까지의 시간 안에서 이뤄진다. 그사이 여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을 통해 뫼르소에게 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뫼르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화해하지 않고 자신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질서를 부정한다. 세계를 부정하는 그는 차라리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고. 오로지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것만을 말하는 자기 실존의 영웅, 거짓에 저항한 뫼르소는 그가 속한 세상의 이방인임이 틀림없지만 자기 삶에서는 끝내 이방인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엔딩은 거짓말을 못 하는 자가 죽음을 선고받는다는 데에 있지 않다. 죽음을 선고받고도 사라지지 않은 그의 행복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행복이 두 번이나 강조된다. 이때 행복이란 말의 의미는 자기 삶에서 이방인이 되지 않은 자가 삶의 중심에서 느끼는 삶과의 일체감일 것이다. ‘다정한 무관심의 세계’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표준화에 서로 다른 사람을 억지로 맞춘 폭력적인 관심의 세계와 반대된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진심은 적은 비용이 아니다. 그 적은 비용을 외면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외부와 단절됐었지만 자신과는 단절되지 않았던 뫼르소는 맨주먹 안에 확신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어느 이방인의 죽음으로 기록될 것이나, 우리는 이 결말을 한 인간을 장악하려 했던 거짓의 죽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다. 포도 농장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전쟁에 징집돼 목숨을 잃은 뒤,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교사의 총애를 받으며 재능을 키우다 장학생으로 선발돼 대학에 간다. 알제 대학 철학과 재학 시절,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하면서도 창작의 세계에 눈을 떠 가는데, 무엇보다 이 시기에 장 그르니에를 만나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여긴다. 1934년 그의 권유로 공산당에도 가입하지만 내면 갈등을 겪다 탈퇴한다. 교수가 되려 했으나 건강 문제로 교수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고, 진보 일간지에서 신문 기자로 일한다.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며,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 희곡 ‘칼리굴라’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다. 1947년 7년여를 매달린 끝에 탈고한 ‘페스트’를 출간하는데, 이 작품이 반향을 일으키며 ‘비평가상’을 받는다.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지만 3년 후인 1960년 1월 4일 미셸 갈리마르와 파리로 떠나다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