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LA 필하모닉은 정기적으로 할리우드볼 여름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사진 LA 필하모닉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LA 필하모닉은 정기적으로 할리우드볼 여름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사진 LA 필하모닉

평상시라면 미국의 여름은 100인조 관현악 편성으로 영화음악을 선보이는 ‘팝스 오케스트라(영화음악 등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시간이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는 여름에 팝스 오케스트라로 변신한다. 대표적인 주자가 보스턴 심포니다. 이들은 여름 비수기에 팝 음악 보급을 목표로 단체명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로 변경하고 탱글우드 페스티벌에 참여해왔다. 클래식 공연에선 보통 검정 정장을 입던 보스턴 심포니 단원이 탱글우드에선 흰색 연주복으로 갈아입는다. ‘경음악의 거장’ 아서 피들러, ‘영화음악의 대가’ 존 윌리엄스가 장기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맡아 세계 최정상의 사운드를 선보였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LA 필하모닉(LA 필)은 악단 태생부터 영화음악과 연계됐다. LA 필이 여름에 야외 공연장 할리우드볼에서 팝음악을 연주하면 사람이 몰린다. 메이저 영화 배급사가 자사 영상 콘텐츠로 필름 콘서트를 제작할 때도 주로 LA 필과 손잡는다.

신시내티 심포니는 크로스오버 공연에선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꾼다. ‘팝스 콘서트의 귀재’ 에리히 쿤젤 영향으로 실내 공연장에서도 최고 수준의 경음악을 뽑아냈다. 쿤젤이 베토벤, 차이콥스키의 대편성 관현악곡을 다룰 때도 악단명은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를 유지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올해 여름 팝스 오케스트라 시장은 얼어붙었다. 할리우드볼은 여름 축제뿐 아니라 공연장 운영 자체가 불투명하고, 탱글우드 페스티벌은 온라인 이벤트로 축소됐다.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는 혹서기 필름 콘서트 대목을 놓쳤다. 미국에서 팝스 오케스트라 공연은 향후 1~2년간 제작이 어렵다.

팝스 오케스트라의 불황은 음반 산업이 발전한 영국도 비슷하다. 런던에서 ‘경음악의 전당’ 격인 로열앨버트홀은 대관 사업이 주춤하다. 런던 심포니는 음악감독 사이먼 래틀이 향후 5년간 투어가 어렵다고 밝히면서, 행정감독 캐서린 맥도웰이 그를 대체할 재원을 찾고 있다. 영화음악 반주 경험을 살려 런던 심포니는 온라인 게임 음악의 시장성을 타진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연주에 강점을 보이는 일본 역시 오프라인 이벤트가 어렵다. 히사이시 조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뉴재팬 필하모닉(월드 드림 오케스트라)은 리먼 사태 이후 줄곧 클래식 파생 공연의 선두 주자였다. 2008년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히사이시 조와 스튜디오 지브리 합작 25주년 기념 공연에 200인조 월드 드림 오케스트라가 참여했고, 3일간 약 4만2000명의 관객이 들었다. 이들의 공연도 요원해졌다.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작곡가 존 윌리엄스. 사진 보스턴 심포니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작곡가 존 윌리엄스. 사진 보스턴 심포니
레드벨벳 ‘빨간 맛’은 서울시향과 협업을 통해 팝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SM스테이션
레드벨벳 ‘빨간 맛’은 서울시향과 협업을 통해 팝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SM스테이션

‘K팝스 오케스트라’는 SM 덕분 활황

재미난 점은 세계적으로 팝스 오케스트라가 고전하는 한국은 예외라는 것. SM엔터테인먼트는 지난 6월 서울시향과 업무 협약을 하고 7월 협업 음원 ‘빨간 맛(레드벨벳)’과 ‘하루의 끝(샤이니 종현)’을 발매했다. 8월 초 기준, 유튜브 조회 수는 ‘빨간 맛’ 120만 회, ‘하루의 끝’ 40만 회를 기록 중이다. SM은 클래식 레이블 ‘SM Classics’를 론칭해서 서울시향 협업 이외에 콘텐츠 융합에 팝스 오케스트라를 활용하기로 했다.

SM은 지난해에 뉴욕 링컨센터에서 ‘K팝에 대한 음악적 탐색’ 공연을 개최하면서 50인조 임시 악단을 초청했다. 기존 SM 아티스트의 인기를 클래식으로 구현하려면 팝스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SM은 외국과 달리 오프라인 공연에 얽매이지 않아 코로나19 불황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SM 이성수 프로듀싱 본부장이 팟캐스트에서 밝힌 대로 ‘흥미로운 콘텐츠 제작’에는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 “음악의 뿌리가 클래식에 있다”는 이 본부장의 견해는 제일기획 ‘오렌지’, 삼성 영상사업단 ‘나이세스’, LG미디어, 현대전자 멀티소프트 사업본부가 1990년대 클래식 레이블과 함께 영상 사업에 진입할 때 내놓은 주장과 결이 같다. 비록 1997년 외환위기로 대기업이 직접 나선 클래식 레이블과 사업이 모두 정리됐지만 말이다.

SM과 서울시향의 초기 협업 K팝과 K클래식의 접목으로 해석하기엔 부족하다. SM타운 아카이브를 재생하는 데 일급 악단이 팝스 오케스트라로 동원됐다고 봐야 한다. SM은 인공지능, AR 등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향후 실물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대체할 신기술이 개발된다면 팝스 오케스트라가 아닌 다른 방법이 주목받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