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카스텔 마을 뒤에 자리한 독토르 포도밭. 사진 김상미
베른카스텔 마을 뒤에 자리한 독토르 포도밭. 사진 김상미

8월은 복숭아가 제철이다. 탐스러운 백도를 한입 크게 깨물면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화이트 와인 중에 복숭아의 향긋함을 꼭 닮은 와인이 있다. 바로 리슬링(Riesling)이다. 리슬링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지만, 독일산이 가장 대표적이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술을 잘 못하는 사람도 편히 즐길 수 있고 매콤하고 짭짤한 우리 음식과도 잘 맞는다. 독일의 명품 리슬링 와인들에는 흥미진진한 뒷이야기도 가득하다. 리슬링 한잔 음미하며 더위에 지친 입맛을 깨워보자.

독일이 리슬링의 주산지가 된 까닭은 이 품종이 추위에 강해서다. 독일의 와인 산지는 주로 라인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위도상으로 북위 50도, 사할린과 같은 위도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어떻게 포도를 재배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 답을 찾은 이는2000년 전 로마인이었다.

로마는 서유럽을 정복하며 각 지역에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전파했다. 로마인에게 와인은 식생활의 필수품이었다. 물을 안전하게 마시기 위해 물에 와인을 섞어 마셨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원리는 몰랐지만, 알코올로 물속 세균을 없앨 줄은 알았던 것이다. 초기에는 로마에서 와인을 가져다 마셨지만, 식민지가 점점 늘자 로마인은 현지에서 와인을 조달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은 포도를 기르기에 너무 추웠다. 와인 생산을 포기해야 할 위기였지만 역시 로마인은 머리가 좋았다. 추위 속에서도 포도를 재배하는 방안을 알아낸 것이다.

로마인이 라인강의 지류인 모젤(Mosel)강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모젤강 유역은 평지가 거의 없고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계곡의 가파른 경사면뿐이다. 그런데 로마인은 바로 이 급경사에서 해답을 찾았다. 남쪽을 향한 경사지에 밭을 일구면 차가운 북풍으로부터 포도나무를 보호할 수 있고, 평지와 달리 앞 나무가 뒤 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아 모든 포도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강물에 반사된 햇빛이 경사지를 한 번 더 비추므로 포도밭이 받는 햇빛은 평지의 두 배가 된다.

모젤강 유역에는 훌륭한 포도밭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독토르(Doctor)가 가장 뛰어난 밭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밭 이름이 ‘의사’를 뜻하는 독토르일까? 사연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모젤의 대주교였던 뵈문트 2세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떤 치료제를 써도 차도가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는데, 농부 한 사람이 와인을 들고 찾아왔다. ‘이 와인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농부의 말대로 대주교는 와인을 마셨고, 놀랍게도 씻은 듯이 병이 다 나았다. 건강을 되찾은 대주교가 농부를 불러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하자 농부는 자신의 포도밭에 ‘독토르’라는 이름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독토르는 모젤강을 바라보는 베른카스텔(Bernkatel) 마을 뒤편 깎아지른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3㏊(헥타르) 남짓의 작은 밭이지만 워낙 양지바른 곳이어서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때면 쌓인 눈이 가장 먼저 녹는다고 한다. 독토르 밭에서 생산된 와인을 맛보면 풍부한 과일 향과 은은한 꽃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진다. 와인을 마시고 난 뒤에는 감미로운 꿀 향이 오랫동안 입안을 맴돈다. 모젤 최고의 와인이 선사하는 향긋함이 온몸을 감싼다.


슐로스 폴라즈 전경. 사진 금양인터내셔날
슐로스 폴라즈 전경. 사진 금양인터내셔날

괴테가 사랑했던 와인 산지, 라인가우

라인가우(Rheingau)는 모젤과 함께 독일 와인 산지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서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곳은 독일의 작가 괴테가 휴식을 위해 자주 찾은 곳이기도 하다. 괴테는 상당한 와인 애호가였는데, 그가 관찰하고 남긴 메모를 보면 좋은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시 각별히 신경 써야 할 점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괴테의 천재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슐로스 폴라즈(Schloss Vollrads)는 괴테가 라인가우에 갈 때면 종종 묵었던 곳이다. 1211년에 설립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우수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와인이 두 가지 있는데, 먼저 에디션(Edition)을 꼽을 수 있다.

이 와인은 슐로스 폴라즈의 임직원이 매년 생산되는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한 뒤 가장 뛰어난 것을 뽑아 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좀머(Sommer)라는 와인을 들 수 있다. ‘여름’이라는 이름처럼 맛이 신선하고 화사해 여름에 가볍게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독일은 귀부 와인(Noble Rot Wine)이라는 스위트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귀부 와인은 귀부균이라는 곰팡이에 감염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귀부균은 포도 껍질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포도가 빨리 마르도록 돕는 착한 곰팡이다. 이렇게 마른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단맛이 농축되고 달콤한 과일 향이 풍부해진다.

독일산 리슬링 중엔 단맛이 나는 것이 꽤 있다. 레이블이 조금 난해하지만 팁을 한 가지 알아두면 어렵지 않게 와인의 당도를 가늠하고 원하는 스타일을 고를 수 있다. 단맛이 없는 리슬링은 알코올 도수가 12~13%지만 단맛이 나는 것은 알코올이 대개 10% 이하다. 발효되지 않은 잔당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가 낮을수록 잔당이 많아 단맛이 강하다는 점이 포인트다. 유난히 긴 장마와 높은 습도에 지친 올여름. 마지막 무더위를 향긋한 리슬링으로 상큼하게 마무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