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 정상에 바라본 청풍호(충주호). / 이우석

쉰다는 뜻의 휴(休) 자를 살펴보면 사람(人)이 나무(木)를 만난다. 힐링엔 역시 숲이 제격이란 이야기다. 꽃보다 나무가 그리운 시기가 왔다. 오월의 숲은 싱그럽다. 해가 들기 시작하면 연둣빛 어린 나뭇잎이 연신 산소를 토한다. 나무 사이로 불어드는 바람은 이를 모두 모아 사람에게 전한다. 피톤치드는 둘째치고 그저 숨쉬는 것만으로 즐겁다.

근사한 숲과 드넓은 호수를 품은 청풍명월 제천(提天)이 콘크리트 도시에서 지친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청풍호 벚꽃과 함께 관광버스가 잦아들었다 해서 제천 가는 38번 도로를 탔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어쩜 이리도 멋진 별칭일까. 듣기만 해도 귀지가 사라질 듯 청명한 이름이다.

청풍명월 이름의 유래는 삼봉 정도전과 관계 있다. 태조가 조선을 세운 직후, 정도전에게 전국 곳곳 사람들의 품성을 물어봤다. 이에 정도전은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거울 속 미인),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맑은 바람과 밝은 달),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바람 앞의 버드나무),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소나무와 대나무처럼 곧은 기개), 강원도는 암하노불(岩下老佛·바위 밑 늙은 부처),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봄 파도에 돌던지기),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산속 사나운 호랑이)”라 했다.

정도전이 단양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충청도가 가장 근사해보인다. 아무튼 제천에는 ‘청풍면’이 있을 정도로 이 근사한 명칭에 충실하게 대응했다. 제천 사람들이 청풍호라 부르는 충주호 둘레 58㎞를 한바퀴 둘러보면 어느 곳에 멈춰서더라도 감탄을 자아낸다. 제천 사람들은 강원도 부럽잖은 절경의 자연 속에서 청풍명월의 품성을 오롯이 지켜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옥색 물빛이 고운 의림지. / 이우석

“거긴 거진 강원도유.” 충남 바닷가 사람들에게 제천 이야기를 하면 이런 의견이다. 아무래도 자연환경이 많이 다르다(말투도 다르다). 월악산, 금수산, 비봉산 등 산세가 범상치 않다. 태백에서 내려온 남한강, 충주호(청풍호), 의림지의 물색도 아름답다. 지세가 좋으니 약초들도 효능이 뛰어나다. 황토를 내세우며 세계 한방(韓方) 약초의 메카로 자처하고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박달령(朴達嶺)을 넘으면 숨통을 틔우는 청풍명월의 맑은 공기가 차창을 통해 세차게 밀려 들어온다. 겨우 생존할 정도의 대기 속에 살다 이곳에 오니 여기선 죽도록 일을 해도 쉬는 느낌일 테다.

영화 ‘박하사탕’에 등장한 애련리 진소마을은 강물 위 한적한 철길이 근사하다. 동량~삼탄~공전을 잇는 충북선 열차가 돌아나가는 철길인데, 어찌나 고요한지 강물 위를 지나는 화물열차라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공전역은 이제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고 공예체험관으로 변신했다.

충청도를 이르는 호서(湖西)란 말은 제천 의림지(義林池)에서 생겼다 한다. 의림지 서쪽이 호서인 셈이다. 지금이야 충주호가 대단하지만 먼 옛날에는 의림지가 인공호를 대표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동해안 석호(潟湖)나 화산 칼데라호를 제외하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가 거의 없다. 가장 크다는 자연호인 서번호(함경북도·약 16㎢) 역시 소양호의 4분의 1도 안 된다.

대신 다목적 댐을 지어 생겨난 인공호가 많다. 1987년에 완공된 충주호는 소양호보다 조금 작고 대청호보다 크다.

‘내륙의 바다’가 맞다. 호반을 따라 돌면 끝도 없이 펼쳐진 호수의 쪽빛물과 음영을 달리하며 첩첩이 멀어져가는 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제천 맛집 ‘예촌’의 더덕구이. / 이우석

비봉산 패러글라이딩 ‘강추’

82번 국도는 금월봉, 청풍 나루터, 옥순봉, 상천리 마을, 능강 솟대문화공간, 청풍리조트 등 명소들을 줄줄이 꿴다. 바람 따라 벚꽃은 졌지만 그 분홍 흔적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제천 사람들은 ‘청풍호’ 이름을 고집한다. 인접 시·군 중 수몰 면적이 가장 넓기 때문이다. 당시 제천시 청풍면 등 5개면 61개 마을이 잠겼다.

뱃길도 좋다. 봄을 맞아 다시 운항을 시작했다. 충주댐나루터에서 장회나루까지 52㎞에 걸친 뱃길은 내륙에서 가장 길고 멋진 항로다. 금수산 기암괴석과 옥순봉 석벽, 그림같은 다리(옥순대교)를 감상할 수 있다.

산길은 또 어떤가. 비봉산(飛鳳山·531m)에 가면 한눈에 청풍호를 담을 수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정상에 오르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다. 이곳에서 360도 파노라마의 그림 같은 풍경이 기다린다.

맑은 공기에 욕심을 더 낸다면 자드락길을 걸으면 된다. 맑은 바람(淸風)에 땀을 식혀가며 보약 같은 산소를 폐부 가득 챙겨갈 수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호숫가를 간다면, 또 운이 좋다면 물안개의 몽환적인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봄은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물안개를 볼 확률이 높다. 청풍면 황석리에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를 빼닮은 노송이 있다. 안갯속 우뚝 선 그림자로 사진가들의 셔터 소리를 즐기며 고운 자태를 뽐낸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비봉산 정상까지 관광모노레일(2.9㎞)을 타면 편하다. 편도 23분이 소요된다. 예약 (043)642-3326.

청풍문화재단지는 과거 수몰된 청풍면의 옛 역사와 전통 유물을 모아 보존한 곳으로 당시의 마을 형태를 그대로 옮겨다 재현했다. 호수가 바라보이는 곳에 제천청풍한벽루(보물 제528호),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546호) 등 53점의 문화재가 남았다. 금수산 자락의 신선봉 절벽 아래에는 신라시대(662년·문무왕 2년) 창건한 천년고찰 정방사가 있다. 법당, 칠성각, 유운당, 석조관음보살입상, 석조지장보살상, 산신각, 종각 등이 벼랑 위에 서있다.


자드락길

‘자드락길’은 7개 코스 총 58㎞에 조성한 길로 호반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코스다. 흙길과 숲길이 적당하게 배치된 1코스 ‘작은동산길’과 산길을 통해 오르는 6코스 ‘괴곡성벽길’이 인기가 좋다. 제천시청 관광과 (043)641-6690.


먹거리

울금을 이용한 떡갈비 정식을 선보이는 ‘황금가든’은 다져서 만든, 씹는 맛이 좋은 떡갈비를 푸짐하게 내는 집이다.

쏘가리와 잡고기 매운탕은 청풍리조트 인근 교리가든이 유명하다. 오랫동안 끓여 내오는데, 살이 무르지 않고 비린내도 없다.

봉양읍 ‘산아래’는 직접 재배한 유기농 야채를 곁들인 우렁쌈밥을 맛있고 정갈하게 차려낸다.

제천 중앙시장 빨간오뎅은 매콤한 양념에 적신 어묵꼬치가 유명한 집이다. 의림동 덩실분식은 고소한 팥소가 든 찹쌀떡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