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두 개의 방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냥 알아버린 사실이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종종 두 개의 방을 기억하고 방문할 때가 있다. 건조한 방과 습기 찬 방. 편의상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지만, 나의 건조한 방에 퀴퀴한 습기가 차오를 때도 있고 또 나의 습기 찬 방이 바싹 말라갈 때도 있다. 그래도 나의 두 방은 서로 견제하며 대체로 자신의 본성이라고 믿고 있는 습기와 건조를 별 다툼 없이 꾸준히 유지해 나가고 있다.

내가 주로 머무는 방이 어디냐에 따라 지나가는 시기의 성격이 결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내가 머물던 방은 주로 건조한 방이었다. 하지만 3학년에 올라가면서 내 거처를 습기 찬 방으로 옮겨버렸다. 나는 아주 축축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거의 불편한 지경이 돼버리기까지 했다. 그럴 때면 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특별한 고민거리는 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의도적으로 내가 머물던 방을 옮겨보기도 했다. 나는 부쩍 친구가 많아졌고 대부분 사람에게 외향적이고 호감을 자아내는 아이로 여겨졌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적절한 호응을 보내는 것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때로는 유쾌하고 긴장감 넘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시기이든, 내가 사람들을 주로 맞이하는 공간은 건조한 방이었다. 누군가가 슬며시 습기 찬 방으로 넘어올라치면 그들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오래된 습기를 의도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망설임 없이 외면했다.


어느 틈엔가 내 방에 자리 잡은 당신

사람들은 대부분 습기 찬 방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해묵은 습기를 보여주는 것이 적당한 방법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몇몇 친구들이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안내한 그들만의 깊고 눅눅한 자리는 오히려 나를 멀찌감치 달아나게 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나의 후퇴에 당황했지만 나는 제대로 된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반응이 너무나도 격렬해서 나조차도 어리둥절했으니까.

당신을 알게 되면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 하나는 당신은 어느 틈엔가 일찌감치 내 습기 찬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의도적으로 맞아들인 적이 없었건만 당신은 내 방 한구석을 버젓이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내 방문에 예의 바른 노크를 한 적도 없었고 애절하게 그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당신은 습기 자체였기에, 익숙한 습기를 따라 나의 방 안으로 스며들어 그대로 섞여버렸다. 방 안의 습기 속을 맴돌다가 자신이 있기 좋은 한구석에 당신의 습기 분자를 끌어모아 적당한 형체를 갖추고는 조용히 잠을 자기도 했고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내게 더듬더듬 아침 인사를 속삭이는 일도 있었다.

당신이 내 방으로 들어온 방법은 너무나도 남달라서 나의 날카로운 방어본능을 건드리지 않고도 가능했다. 그냥 그렇게 스며들었을 뿐, 자신의 축축함을 드러내서 동질감을 호소하거나 습기 찬 방에 초대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열성적으로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 당신은 섬세했지만 연약하지 않았고, 민감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당신은 자신의 존재에서 편안한 균형을 이룬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당신을 경이롭다고 느꼈다. 단순하고 명쾌하고 태생적으로 즐거운 사람이 아니면서 그와 같은 안정을 이룬 사람을 보는 것은 드물었으니까.

언뜻언뜻 보이는 상흔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상흔’이라고 불렸을 뿐, 실은 남들과 조금 다른 생김새에 가까웠다. 삶의 조건과 경험, 이를테면 누구의 아들, 누구의 연인이었기에 생긴 상처들과는 본질부터 달라 보였다. 어쩌면 그것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일지 몰랐다. 당신의 ‘상흔’은 인고의 세월 속에서 문드러진 꼬리뼈를 떠올리게 했다. 옛 생에 대한 기억, 진화와 함께 사라진 꼬리에 대한 추억 말이다. 조금 더 도드라지게 남아 있어 사라진 것을 더 많이 추억하게 하는 장치. 그것은 얼핏 처량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강렬한 의지, 잃어버린 생에 대한 그리움의 발현처럼 보였다.

어느 늦은 겨울날의 오후, 당신은 약속 시각보다 5분 정도 늦게 나왔고 나는 그 시간을 영겁의 시간처럼 아득하게 느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함께 영화를 보고 당신 손에 이끌려 이국의 도시를 정처 없이 산책했다. 지는 해를 보며 나는 말했다.

“이상해. 사람은 한 번도 완전한 상태를 체험한 적이 없는데도 마치 그러한 상태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니 마치 그러한 상태를 이미 경험한 것처럼 상실감에 시달리잖아. 과거를 향한 그리움과는 다른,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 말이야. 전혀 도달한 적없는, 어쩌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느 불특정한 시공간을 향한 노스탤지어라고 할까.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속으로 가라앉아버려. 특별히 우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잦아드는 정도인데, 그 느낌에 푹 빠져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거야. 그냥 가볍게, 하지만 어딘가 치명적인 기분으로.”


슬퍼서 행복한 때도 있어

사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이미, 당신과의 완전한 시간이 절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사고를 당하듯 완벽한 순간을 꿈꾸게 될 때가 있다. 결국은 실망하며 뒷걸음질치게 될 테지만 포기되지 않는.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없이 안심시키는 편안한 얼굴이 되어.

“그게 바로 ‘멜랑콜리’야. 슬프되, 슬퍼서 행복한 상태. 그건 마치 그냥 네 몸에 그려진 무늬처럼, 네 일부가 되어버린 감정일지도 몰라. 흔들리면 수면에 떠오르는, 가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네 안에 있는 것일 거야.”

당신을 만나면서 나는 사람 중에는 조금 더 슬픈 사람이 있고 조금 더 기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슬픈 사람 중에는 조금 더 슬퍼서 기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슬픔의 유희를 즐길 줄 알았고 그것의 은밀함을 차곡차곡 접어놓을 줄도 알았다. 내가 당신에게서 부러웠던 것은 조금 더 슬퍼도 그 속에서 꿋꿋이 조금 더 슬퍼서 기쁠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 은밀함이 당신을 병들게 하지도 않았고 은근한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질투를 느꼈다.

내게는 한없이 고되었던 균형 잡기가, 당신의 존재 속에선 흐르는 물속 물고기의 유연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매끄러운 몸짓으로, 나를 두고 어디론가 흐르듯 떠나 버렸다. 나는 그제야 꼭 잡아둔 숨을 열어, 물 밖 세상으로 코와 입을 열었다. 햇볕에 바짝 마른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시며, 나는 애초부터 인간이 되고 싶은 인어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물로 온전히 돌아가고 싶은 고래 한 마리, 한 쌍의 아가미가 그리운 포유류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