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일 년에 한 번쯤, 세상 어딘가에는 영원한 해피엔딩이 있을 거라고 믿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사진은 영화 음악가 마일스(잭 블랙·오른쪽)가 낯선 칼럼니스트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와 가까워지는 장면. 사진 IMDB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일 년에 한 번쯤, 세상 어딘가에는 영원한 해피엔딩이 있을 거라고 믿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사진은 영화 음악가 마일스(잭 블랙·오른쪽)가 낯선 칼럼니스트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와 가까워지는 장면. 사진 IMDB

크리스마스 시즌이 가까워지면 대기를 떠다니는 공기 방울이 별사탕처럼 반짝거린다. 귀를 막아도 눈을 감아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캐럴과 크리스마스트리의 깜빡이는 불빛이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선물 포장을 뜯고 유리잔을 부딪쳐 건배를 끝낸 뒤 주위를 돌아보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더욱더 차갑게 느껴지는 현실, 꿈을 깨고 우두커니 눈을 뜬 영혼들과 그 잠깐의 꿈조차 꿀 수 없어 외로웠던 가슴들은 생각한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대신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달콤하고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만다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영화 홍보 제작자지만 연애에서만큼은 늘 실패자다. 연말을 앞두고 애인과 헤어진 그녀는 남자와 일과 도시 생활에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영국 런던에서 칼럼니스트로 일하는 아이리스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의 약혼 발표에 충격을 받는다. 주위 사람이 비웃는 것 같은 시선 속에서 초라하게 움츠러든 그녀는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솟든, 사라지고만 싶다.

아이리스와 아만다는 인터넷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2주간 집을 바꿔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며 런던 외곽의 눈 덮인 작은 집에 숨어든 아만다에게 뜻밖에도 아이리스의 오빠, 그레엄이 나타난다. 낯선 곳에 가면 진짜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미국으로 날아왔던 아이리스도 꼭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실속 없는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영화 음악가, 마일스를 만나게 된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결혼 상대자가 다섯 블록 이내, 또는 2㎞ 안에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조사 대상자 중 60%가 넘는 사람이 직장이나 학교, 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다는 또 다른 조사 결과도 있다. 결국 좁은 범위에서 알음알음 만난 사람이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나는 이런 사람,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는 세간의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일 똑같은 세계에서 비슷한 사람과 매번 같은 모양으로 사랑하다 실망하고 상처받던 아만다와 아이리스는 비행기로 열 시간을 날아 자리를 바꿔 앉는다. 로스앤젤레스와 런던 교외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부터 다르다. 피부를 쓰다듬는 온도와 시간, 공기와 바람 냄새마저 새롭다. 도로의 주행 방향과 운전석 위치마저 다른 것에 놀라 당황하는 순간, 그들은 깨닫는다. 내가 아는 사람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없는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그것은 커다란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신나는 모험의 시작이기도 하다.

2주 후면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는 조건 탓에 아만다는 평소보다 과감하게 그레엄에게 마음을 연다. 아이리스도 모든 걸 양보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지금까지의 관계 방식을 내려놓고 마일스와 친구가 된다. ‘끊임없이 과부하가 걸린’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그레엄과 ‘캐릭터가 착해서’ 자신은 매력이 없다고 자조하는 마일스조차 낯선 그녀들에게 솔직한 모습과 마음을 스스럼없이 꺼내 보인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달라지고 의욕이 샘솟는다. 호기심 넘치는 나로 바뀌면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고 생각이 바뀐다. 달라진 내가 달라진 시각으로 바라본 달라진 세상.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가슴에 품은 내가 타인들 눈에 똑같아 보일 리 없다. 가식덩어리 세상에서 누군가 거짓 없이 자신을 당당히 내보일 때, 그 사람은 얼마나 눈부신 매력으로 빛나 보이는가. 그렇게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다. 그래서 ‘여행의 종착역은 사랑’이라고 셰익스피어도 말했을 것이다.

“영화에는 주인공이 있고 조연이 있지. 당신은 분명 주인공감이야. 그런데 꼭 조연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아이리스에게 들려준 원로 시나리오 작가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사춘기만 돼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랑 앞에만 서면 상대를 주인공으로 앉혀놓고 스스로 조연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에 너무 익숙해져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잊고 살아간다. 그렇게 끌려다니기만 했던 아만다와 아이리스가 여행지에서 자기 인생, 자기 사랑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좀 더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마침내 찾은 인연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해서 물리적 거리가 좁아지진 않는다. 수천 마일 떨어진 런던과 로스앤젤레스, 어느 한쪽이 직업이나 일상을 포기해야만 한 집에서 알콩달콩 살아갈 수 있다. 더구나 2주일은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 아닐까. 매번 다른 이름의 여자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엉거주춤 받는 그레엄을 아만다는 믿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만을 해바라기처럼 원했던 마일스와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남자를 사랑이라 믿었던 아이리스가 서로 좋은 짝이 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영화는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지금 이 행복이 차갑게 식을 때까진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뜻일지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을 만들었던 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2006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발표한 영화다. 케이트 윈슬렛과 카메론 디아즈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감성 충만한 주드 로와 따뜻한 잭 블랙과의 커플 매치도 사랑스럽다.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동화의 결말처럼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웃음과 눈물을 적당히 버무린 다음 거짓말 같은 해피엔딩을 선물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다음, 주인공들이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픈 현실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럴 줄 알았네 몰랐네, 갈등하고 대립하다 끝내 헤어질지도 모른다. 백년해로한다 해도 얼마나 많은 언덕과 골짜기를 넘어야 하는지.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쯤, 세상 어딘가에는 영원한 해피엔딩이 있을 거라고 믿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영화를 보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솜사탕 같은 사랑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또는 ‘우리가 저 스토리의 진짜 결말’이라며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도 올 한 해 수고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될지 모른다. 연말이니까. 산타클로스와 루돌프가 있다고 믿어도 좋은 크리스마스니까. 와인 한 모금처럼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며. 메리 크리스마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