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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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었을 때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준 건 국어 시간이었다. 국어 시간에 하는 모든 게 다 좋았다. 매시간 시를 외워 선생님께 검사받은 다음 정확히 외우지 못하면 각종 벌칙을 받았지만 그 긴장된 순간마저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때 외운 산문시들을 지금도 노랫말처럼 중얼거릴 수 있다. 특히 국어 시간에 만든 개인 문집은 지금 회사에 다니며 책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열과 성을 다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문집 만들기에 대한 내 애정이 지금 책 만드는 직업을 선택하게 한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열심이었던 문집의 제목은 ‘새벽 하늘’이었다. 중학생 감성으로 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낭만이 새벽하늘이었던 모양인데, 그렇다 해도 소위 ‘중2병’에 취해 밑도 끝도 없이 가져다 붙인 제목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때 나는 새벽 2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므로 새벽하늘이란 제목은 기실 내 정체성을 제법 사실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 시절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줬던 것이 국어 시간이었다면 내가 유일하게 믿었던 실체는 새벽 시간이었다. 

가족의 잔소리와 걱정과 만류가 없었을 리 없지만 새벽 2시를 사수하기 위한 내 의지에는 거의 비장함까지 서려 있었다. 온 세상이 잠든 것 같은 시간에 나 혼자 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어제를 끝까지 살았고 오늘을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어제도 오늘도 장악하고 있다는 부자 된 느낌에 중독됐던 것 같기도 하다. 전자든 후자든 결국은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진 것도 믿을 것도 시간밖에 없는 사람은 새벽에 의지하고 새벽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까. 남들 다 깨어 있는 낮과 밤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새벽까지 깨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지금도 일찍 잠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런 걸 보면 당시 내가 새벽을 보낸 방식이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내가 한 선택과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이 있을 뿐, 좋은 선택 나쁜 선택 따위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됐다. 내가 한 선택이든 내가 한 선택이 아니든 지금도 내게 신은 ‘새벽’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때도 지금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불안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새벽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거나 호소하는 글을 만나면 내 고백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부끄럽지만 반가움이 앞선다. 이성부의 시 ‘새벽길’이 그런 시다. 이 시는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이성부라는 이름을 들으면 번뜩 떠오르는 시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다음의 시들일 것이다. 서로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사는 벼의 모습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벼’라든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는 말로 미래에 대한 낙관을 보여 준 ‘봄’이라든지.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이성부의 시는 연대와 낙관의 미덕을 부르는 시보다 어둠을 부르는 시다.

‘새벽길’에서 화자는 밤과 낮의 순환에 길 든 채 혼돈과 혼란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화자는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좀비처럼 줄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자기들의 지난날의 이웃이기도 한/ 청년의 이야기를 잊어버린 지 오래”인 상태라고 진단한다. “귀가 먹었다”고 비난받는 이들은 무엇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청년 시절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불안이다. 그들은 불안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길들고 있다. 그들을 향해 시인은 암흑의 한가운데로 가라고 한다. 미래의 처음으로 가라고 한다. 미래의 처음에 진입하려면 새벽길로 가야 한다. 새벽은 길들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라고 하기엔 오늘에 가깝고 오늘이라고 하기엔 과거의 흔적으로 가득한 혼돈의 시간이자 미결정의 시간. 결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규정하는 대로 정의 내려지는 시간. ‘미래의 처음’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끝이 될 수도 있는 이 시간은 ‘완성된 암흑의 한가운데’다. 내가 만들고 운용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소리를 듣기 위해 어둠의 한가운데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행복보다 예측할 수 있는 슬픔을 선호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암흑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미래의 처음을 도모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일 수 있다는 말도 믿어 볼 만하다. 우리는 슬픔과 불행을 관리하며 살아가면서 그걸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길들어 있다.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건 문제가 된다. 

3년 전 여름휴가 차 떠난 속초의 한 호텔에서 일출을 보려고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운 적이 있다. 숙소의 발코니에 의자를 들고 나가 우두커니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서서히 동이 터 오고 해가 나오자 일시에 주변이 환해졌다. 

해가 뜨는 순간, 알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솟아오르는 해가 아니라 서서히 변해 가는 어둠이라는 것을. 서로 밀어내고 밀려가며 어둠과 빛이 자리를 바꾸고 있을 때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실감이 왔다. 빛보다 더 밝은 건 어둠의 빛이었다. 새벽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의 빛. 살면서 한 번쯤, 어둠의 빛을 보기 위해 내 발로 암흑의 핵심까지 가고 싶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이성부

사진 조선일보 DB
사진 조선일보 DB

1942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사회상을 반영한 주제를 많이 다뤄 참여문학 계열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성을 놓지 않고 뭉클한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시로 ‘벼’와 ‘봄’이 있다. 모의고사나 수능특강 교재 등에 시가 실리기도 해, 청소년들에게 잘 알려진 시인이다. 2012년 2월 28일에 지병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