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국 소설가 로알드 달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1960년대는 영국 사회가 끝없는 혼란을 겪던 때였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생산성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영국 경제를 질퍽질퍽한 늪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어린 소년 찰리 버킷이 살고 있던 작고 허름한 집은 당시 영국이 처한 현실과 다를 게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은 찰리의 낡은 집과 비교된다. 이 거대한 격차는 영국인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 세기 동안 그들이 마주했던 현실 그 자체였다.

그래서 찰리가 공장 견학을 무사히 마치고 윌리 웡카의 후계자가 됐을 때, 수많은 영국인들이 환호하고 로알드 달에게 찬사를 보낸 건지도 모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였지만, 사실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미래 버전이자 미국 버전이다. 1960년대의 영국은 2040년대의 미국으로 바뀐다. 작고 허름한 오두막집은 트레일러들이 쌓여 있는 오하이오주의 빈민촌으로 바뀌고, 초콜릿을 사랑하는 찰리는 오아시스(OASIS)라는 가상현실에 몰두하는 웨이드 와츠로 바뀐다. 오아시스를 만든 천재 프로그래머 제임스 할리데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윌리 웡카의 미래·미국 버전인 셈이다. 할리데이는 자신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오아시스에 3개의 미션을 숨겨놨고, 윌리 웡카 역시 후계자를 찾기 위해 초콜릿 속에 황금티켓을 넣었다.

이야기의 기본 줄기는 비슷하지만, 찰리와 웨이드가 후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다르다. 찰리는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을 꿈꾸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욕심 없고 착한 소년일 뿐이다. 그렇지만 웨이드는 할리데이의 오아시스를 얻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고 필요하면 반칙도 마다하지 않았다. 두 개의 이야기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세상을 만드는 건 몽상가다.’ 할리데이의 모든 것을 기록해 둔 방대한 도서관인 ‘할리데이 저널’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자면, ‘세상을 만드는 건 몽상가지만, 세상을 구하는 건 오타쿠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오타쿠는 뭔가 우습고 조롱받는 이미지가 됐다. 사람들은 오타쿠라고 하면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와 연애를 하는 뚱뚱한 남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오타쿠의 애초 뜻은 그런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오타킹’으로 부르는 오카다 토시오는 오타쿠를 특정한 소양과 기본을 갖춘 문화 집단으로 정의했다.

오카다는 ‘고성능 레퍼런스 능력을 바탕으로 창작자의 암호를 하나도 남김없이 읽어내려는 탐욕적인 감상자’를 오타쿠라고 지칭했다. 할리데이가 남긴 흔적을 찾아 그의 삶 전체를 끈덕지게 파헤쳐가는 웨이드는 이런 맥락에서 오타쿠의 전형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오타쿠가 세상을 구한다. 거대 자본과 수많은 전문 인력의 도움을 등에 업은 사악한 기업 ‘IOI’의 수장인 놀란 소렌토도 하지 못한 일을 웨이드가 해낸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오타쿠 이미지 바꾸는 스필버그의 마법

스필버그가 거장이고 영화예술의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필버그는 우리가 익숙하게 여겼던 개념과 이미지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틀어버리는 능력이 있다. ‘이티(E.T.)’에서 외계인에 대한 선입견을 깼고, ‘에이아이(A.I.)’에서는 로봇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어놨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오타쿠의 이미지를 바꾼다. 가상현실에 매달려서 게임만 하는 오타쿠들이 사실은 글로벌 기업의 수장보다 멀쩡한 인간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구하는 건 그들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런 목소리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게 만드는 게 감독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스필버그는 단연 최고다. 스필버그는 20세기 대중문화의 추억들을 소환한다. 오타쿠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대중문화의 걸작들을 웨이드 일행의 여정 중간중간에 삽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웨이드가 퍼즐을 맞춰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영화와 만화, 음악과 소설에 대한 추억과 애정을 돌아보게 된다.

웨이드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들로리안을 타고 킹콩과 티렉스를 피해 달리고, 사만다 에벨린 쿡은 ‘아키라’에 등장하는 빨간 바이크를 탄다. 어린시절 ‘백 투 더 퓨처’를 보며 들로리안을 마음속에 품었던 이들은 웨이드의 질주를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게 된다. ‘아키라’를 즐겨봤던 이들은 망가진 빨간 바이크의 모습에 사만다만큼이나 낙담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은 웨이드 일행인 다이토의 아바타가 등장할 때였다. 메카고지라를 저지하기 위해 다이토가 “나는 건담이 되겠어!”라고 외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퍼스트 건담인 ‘RX-78-2’가 공중에서 하강하는 장면은 ‘기동전사 건담’의 팬이라면 심장이 멈칫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다.

140분간에 걸친 긴 상영 시간 내내 이런 식으로 과거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소환되고, 이 아이콘들은 하나하나의 퍼즐이 돼서 관객들의 추억을 완성시켜준다. 오타쿠처럼 무엇 하나에 집요하게 매달린 적이 없는 관객일지라도 오래된 추억 앞에서는 무장해제되기 마련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쯤 가면 관객들은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작은 영웅들을 응원하게 된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보면 그들에게 무엇이 결핍됐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찰리가 초콜릿 공장의 후계자가 됐다고 해서 1960년대 영국 사람들의 삶이 나아진 건 아니듯이 웨이드가 오아시스의 주인이 됐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나아질 것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웨이드의 모험에 환호하는 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됐는지 영화를 보며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위해 핵미사일까지도 기꺼이 막아줄 아이언 자이언트 그리고 용광로에 들어가면서도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주는 터미네이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엔 이 술

쿵 푸 걸 리슬링(Kung Fu Girl Riesling)

미국의 와인메이커 찰스 스미스는 와인 오타쿠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록밴드 매니저로 일하기도 한 그는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독학으로 배웠다. 첫 와인을 출시한 건 2001년. 와인 사업에 뛰어든 지 20년도 안 된 햇병아리지만, 와인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런 애정 덕분에 쿵 푸 걸은 와인 스펙테이터의 ‘2016년 세계 100대 와인’에 선정됐다. 오타쿠스러운 열정이 그를 와인계의 떠오르는 별로 만들었다.

-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아드벡(Ardbeg)

병원 소독약 냄새 같은 피트향이 강한 싱글몰트 위스키는 몇몇 애호가들만 즐기는 술이었다. 특히나 아드벡은 개성이 강해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결국 1981년 아드벡 증류소는 문을 닫았다. 아드벡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건 루이뷔통으로 유명한 프랑스 명품업체 LVMH다. LVMH는 1997년 아드벡 증류소를 인수해 생산을 재개했다. 명품업계의 거장은 아드벡 오타쿠들의 추억을 만족시켰고, 부활한 아드벡은 매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 유성운 한국위스키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