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지휘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리카르도 무티. / 토드 로젠버그
세계 최고 지휘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리카르도 무티. / 토드 로젠버그

영국 일간 더타임스의 일요판 ‘더 선데이 타임스’가 매년 4월 말에 발표하는 ‘선데이 타임스 기부 명단(Sunday Times Giving List)’은 영국의 예술 조직 펀드 레이징 전문가들에게 귀중한 자료다. 개인별 자산 대비 누적 기부액 비율로 200위까지 랭킹을 매긴 이 목록은 ‘선데이 타임스’가 매년 영국 내 부자 순위를 매기는 ‘선데이 타임스 부호 명단(Sunday Times Rich List)’의 하위 카테고리로, 최근 자선 동향을 조망하는 데 유익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 크리스 혼과 2014년 이혼한 미국의 자선가 제이미 쿠퍼는 2015년부터 차트에 등장해, 위자료로 받은 약 3억3700만파운드(약 5000억원) 중 2억500만파운드(약 3050억원)를 기부해서 자선비율 60%로 2017년 1위에 올랐다.

수퍼마켓 체인으로 유명한 세인스버리가 35%로 2위, GE 유럽 보험 부문 최고경영자 출신의 클라이브 코더리(Clive Cowdery)가 30%로 3위다. 팝 가수 엘튼 존과 ‘해리 포터’ 시리즈 작가 JK 롤링의 기부 경향도 파악할 수 있다. 미술·박물관에선 재닛 드 보텀(Janet de Botton), 조너선 루퍼(Jonathan Ruffer), 니콜라이 탕엔(Nicolai Tangen)이 현재 런던 예술계를 주름잡는 대표 큰손들이다.

최근까지 영국 예술조직의 펀드레이저들은 2016년에만 약 8600만파운드(약 1275억원)를 기부한 제이미 쿠퍼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보건, 기후변화, 아동영양, 교육으로 자선 범위를 확장한 쿠퍼가 예술 분야로 눈을 돌린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떠나고 2017년 9월 영국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후임 감독으로 돌아온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가 신규 후원 회원 모집에 혈안이었다.

게르기예프가 런던을 떠나자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고(故) 요코 체스키나(Yoko Ceschina)의 펀드도 LSO를 떠나, 게르기예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관장하는 마린스키 극장의 분원, 프리모르스키 극장으로 이동했다. 하프를 전공한 요코 여사는 이탈리아의 대부호 렌초 체스키나와 결혼했고 남편이 작고한 이후, 막대한 유산을 세계적 지휘자와 악단을 후원하는 데 썼다. 게오르그 솔티,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도 후원했다. 또 2007년 뉴욕 필하모닉이 북한 방문 공연 자금이 부족할 때 이를 지원한 이도 요코 여사다. 2012년 런던 심포니가 내한하자 요코도 서울에 왔고 공연이 끝난 밤마다 통음하는 게르기예프를 끝까지 챙겨달라고 주변 매니저들에게 당부했다.

‘클래식 음악의 수도’ 런던을 대표하는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런던 심포니, 바비컨센터의 기부자(Donor), 후원자(Patron), 자선가(benefactor)에 이름을 올리면 영국에서 예술계 명사로 공인인증받은 것과 다름없다. 연간 기부액 2만5000파운드(약 3700만원)면 바비컨센터의 주요 후원자(Leading Patron)에 등재가 가능하고 예술조직들은 부호 회원들을 위한 이벤트 마련에 골몰한다. 후원 인사 간의 사교 모임은 드문 편이며 일반인 비공개로 진행되는 연회에 악단원이 출장을 가거나 후원 가문의 장례식에 예의를 갖춰 참석하는 일도 기금 담당자들의 업무다. 일부 예술조직은 후원기금을 유치하는 전문가들에게 커미션을 공식적으로 지급한다. 특히 미국에선 대중화된 방식이지만 ‘로비’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 분위기에선 도입이 어렵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장기 계약하면서 시카고 심포니(CSO)를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에 올린 리카르도 무티는 전 이사회 의장 크리스토퍼 멜빈에게 특별한 제안을 받았다. 시카고에서 리서치 회사 멜빈 앤드 컴퍼니(Melvin & Company)를 운영하는 멜빈은 바로크나 컨템퍼러리 곡이 아닌 고전 작품을 무티가 직접 지휘하는 공연에 한정해, CSO에 200만달러를 기부하는 약정에 서명했다. 무티가 입장 판매 수익에 신경 쓰지 말고 음악에 집중하라는 수퍼리치의 특별한 권유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신임 음악감독 야닉 네제 세갱(왼쪽)과 후원자 재클린 드마레이. / 트위터 캡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신임 음악감독 야닉 네제 세갱(왼쪽)과 후원자 재클린 드마레이. / 트위터 캡처

美 클래식계, 기부 유치에 사활

캐나다 출신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이어 올해 9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음악감독에 부임하는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의 뒤에는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자선가 재클린 드마레이(Jacqueline Desmarais)가 있었다. 1989년 몬트리올 심포니 후원을 시작으로, 1997년 젊은 성악가 장학 재단을 결성하고 몬트리올 오페라를 후원하면서 네제 세갱과 만났다. 드마레이가 메트 HD라이브의 캐나다 상영권을 구매하면서 네제 세갱과 메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캐나다에선 앞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클래식 자선가로 평가되고, 제임스 러바인의 성추문과 메트 오페라 관람 수익의 저조로 골치를 썩는 메트에선 퀘벡에서 온 기부천사를 영영 놓치게 됐다.

국가 지원이 요원한 미국 클래식계에서 기부 유치는 예술조직 운영의 알파와 오메가다. 미국 프로 악단의 결사체 ‘아메리칸 오케스트라 리그(League of American League)’는 연간 정례회의를 통해 미국 각지에서 유행하거나 성공한 각종 기금 마련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성공 사례를 전파한다. 악단 경영자들의 이러한 집단 행동은 오케스트라의 수익 사업을 위해 헌신할 인재들만이 미국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수장으로 함께 갈 수 있다는 암묵적인 카르텔을 제시한다. 대다수 노장 지휘자들이 미국 악단 감독을 꺼리는 틈에 사회성으로 무장한 신인 지휘자들이 깜짝 인선을 통해 악단 감독을 꿰차는 경우를 미국에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국내에선 예술의전당 후원회 활동이 대표적이다. 예술의전당은 후원회 전담 직원을 두고 임기제 임원단을 운용하면서 후원 액수에 따른 예우와 등급 간 마찰 없는 차별화에 고심하고 있다. 최고 등급은 1억원 이상 후원한 ‘무궁화’ 회원으로 약 15개 개인과 법인이 등록됐다. 서울시향은 1억원 이상 후원자를 ‘평생(Lifetime)’ 등급으로 예우하면서 리셉션 쿠폰 10매, 백스테이지 투어, 해외 투어 시 동반 기회(비용 본인 부담) 등을 부여한다. 현재 약 13명가량의 회원이 등재됐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런던 시티대 예술정책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