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군에 핀 노란 산수유. 봄꽃은 대개 노랗거나 하얗지만 여름꽃은 붉은 색이 두드러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 조선일보 DB
전남 구례군에 핀 노란 산수유. 봄꽃은 대개 노랗거나 하얗지만 여름꽃은 붉은 색이 두드러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 조선일보 DB

나무가 말하였네 - 옛시
고규홍 지음|마음산책
1만3500원|288쪽

“세상 사람들은 모양과 빛깔로 꽃을 보지만/ 나는 오로지 생명의 기운으로 꽃을 바라본다오/ 꽃의 생기 온 천지에 가득 차오르면/ 나도 따라서 한 떨기 꽃 되리라.”

조선 후기의 문신 박준원이 쓴 시다. 당연히 한자로 쓴 것을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이 우리말로 옮겼다. 고규홍은 젊은 시절에 열두 해 동안 신문 기자를 지내다 일찌감치 퇴사해 스스로 ‘나무 칼럼니스트’라는 새 영역을 개척해왔다. 나무를 노래한 시를 그 나무와 엮어 풀이한 책 ‘나무가 말하였네’ 시리즈를 통해 문학과 생태학이 교차하는 순간의 묘미를 글과 사진으로 일깨워왔다.

올봄에 고규홍은 ‘나무가 말하였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을 냈다. 이번엔 한시(漢詩)와 나무다. 앞서 인용한 박준원의 시는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꽃을 눈으로 보지만, 그 형상과 색채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서 오는 ‘생명의 기운’을 인식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각이 아닌 직감(直感)으로 꽃을 봄으로써 한 송이 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바람을 담고 있다. 서정적이면서도 다분히 철학적인 시의 수준을 보여줬다.

여기에 고규홍은 남다른 해설을 달았다. 시각장애를 지닌 여성 피아니스트가 나무를 보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을 들려줬다. 그녀는 나무를 만지고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그녀는 나무 줄기에 귀를 바짝 대고 나무의 소리를 들었다’고 전했다.

“오랜 탐색 끝에 하나 둘 셋 넷, 그녀는 나무에 담긴 생명의 기운에 다가섰다. 그리고 차츰 그녀만의 느낌으로 나무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나무의 기운이 온 천지에 가득 차올랐다. (중략) 나를 바라보지 못하는 그녀를 가만가만 바라보며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각을 내려놓으니 촉각이 일어나고 후각이 살아나고 청각이 요동쳤다. 그리고 사유가 시작됐다.”


더 화려하게 등장할 여름꽃을 기다리며

“봄빛 스러지고 온갖 꽃 떨어지니/ 해당화 붉은 꽃만 홀로 화려하다/ 해당화 꽃조차 가뭇없이 사라지면/ 이 땅의 풍경은 적막하고 적막하리.”

조선 시대의 여성 시인 김금원(1817~?)이 남긴 시다. 고규홍은 이렇게 적었다. “봄빛 스러져 봄꽃들 모두 떨어진 바닷가 길 위를 걸으며 붉은 해당화 한 송이를 만나면 이 땅의 풍경을 바라보는 나그네 마음은 한결 풍요로워진다. (중략) 조선 시대에는 흔치 않았던 여성 여행가 김금원이 걷는 길의 적막함을 달래준 건 한 송이 해당화였던 게다.” 

김금원은 여성의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남장을 한 채 여행을 다니며 시를 썼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책은 그녀의 삶에 대해 더 들려주지 않는다. 이름 모를 꽃을 봤을 때 생기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방망이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독자 스스로 꽃을 찾아 산으로 들로 나갈 수밖에.

사족: 고규홍은 만년필 수집가다. 100여 자루를 갖고 있다고 한다. 만년필로 베낀 옛시 공책만 70권이 넘는다. 그런 필사의 노력이 이 책을 맺었다. 책 머리에 쓴 글 제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만년필로 쓰다’로 되어 있다. 무학(無學)이었던 부친이 남긴 유산 중 127만원을 상속받아 만년필 한 자루를 사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