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펍이 들어선 익선동의 한 한옥을 배경으로 20대 여성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임영근
맥주 펍이 들어선 익선동의 한 한옥을 배경으로 20대 여성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임영근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 바로 뒤편 익선동 한옥집단지구에는 아기자기한 크기의 한옥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다. 이곳에서 10분쯤 발을 옮기면 닿는 율곡로 건너 북촌(北村) 한옥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익선동은 주말이면 좁은 골목을 지나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난다. 그러나 불과 3~4년 전만 하더라도 많은 한옥들이 방치돼 있었다. 익선동은 지하철 3호선과 5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인 종로3가역의 바로 뒤에 있어 입지는 좋지만, 오랜 기간 재개발지역으로 묶인 탓에 집주인들이 집을 보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한옥집단지구의 멋에 매료됐고, 북촌과 익선동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가 됐다.


방치된 한옥, ‘핫플레이스’로 변모

북촌과 익선동에는 대략 대지 면적 132㎡(40평) 이상의 대형 한옥과 함께 소형 한옥(작은 경우는 10평 이내)도 존재하는 등 유형이 다양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보기엔 북촌 한옥과 익선동 한옥은 스타일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20~40평쯤의 대지 위에 담을 쌓고 그 담에 창문을 낸 형태의 한옥이 많다.

그런데 TV 사극에서 자주 보는 한옥은 북촌·익선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다.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정원이 있고 별채가 있으며 안채가 있다. 북촌·익선동 한옥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북촌과 익선동의 한옥은 외부 담이 사람이 거주하는 방의 벽이다. 창문이 달린 방이 바깥 길과 접촉해 있다. 건물은 ‘ㄱ’자 ‘ㄷ’자형태로 하나만 존재한다.

‘한옥’이 다 비슷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익선동 한옥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을까?’ ‘역사책에서 이름을 들었던 고관대작들은 현재 북촌 한옥마을 한옥에 살면서, 경복궁으로, 창덕궁으로 조선의 왕을 대면하러 갔을까?’ 답은 ‘아니오’다.

과거 고관대작들이 살던 집은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의 대형 한옥이다. 북촌과 익선동에 존재하는 한옥은 일제강점기 경성의 조선인 수가 급증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이다.

경성은 192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다른 도시로 탈바꿈했다. 그 전엔 소비도시였지만, 이후 생산도시로 변모했다. 이런 변화는 경성 인구 상승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19년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조선인들의 회사 설립이 보다 자유로워졌다. 회사령은 회사 설립 시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어서 1919년 이전 조선인의 회사 설립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회사령 철폐는 조선인의 기업 설립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1920년대 들어 조선계뿐 아니라 일본계 회사 설립도 크게 늘면서 경성엔 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이들 공장은 상당한 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는 일제의 수탈로 토지를 뺏긴 지방의 농민으로 충당됐다.

다른 사회적 요인도 경성의 인구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일제가 과거의 폭압적 정책에서 문화정책으로 방향을 틀면서 북촌 지역에 많은 학교가 세워지고 교육 여건이 좋아지자, 지방 유지들이 자식들을 경성으로 유학 보낸 것이다. 당시 기록은 북촌 일대 한옥에 지방 유지들이 자식 교육을 목적으로 거주했다고 전한다.

경성에 조선인 인구도 늘었지만, 식민지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건너온 일본인의 수 또한 상당했다. 갑작스러운 인구 유입은 주택 부족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북촌에 새로 건설된 한옥집단지구는 조선인 인구 증가에 대응한 도시개발 해결책이었다.


고층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익선동 한옥지구. 조그만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진 서울대 김경민 교수
고층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익선동 한옥지구. 조그만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진 서울대 김경민 교수

한옥 건축공법 한계로 작은 집 지어

당시 조선의 상류층은 일제강점기 경제력이 쇠락하면서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대형 한옥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인구가 증가하는 시기, 즉 주택 수요가 크게 높아지는 때엔 대지가 넓은 대형 주택은 매우 좋은 부동산 개발 재료가 된다. 그런데 건설기법에 따라 다른 방식의 주택 유형이 나타난다.

어느 지역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주택부족 문제가 발생할 때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업자)는 크게 2개 옵션을 갖게 된다. 하나는 대형 주택을 허물고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같은 면적의 주택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한다. 유럽과 미국의 산업도시에선 용적률을 최대한 높이는 방식으로 단독주택이 4~5층의 건물로 바뀌었다. 이런 건물을 미국에선 테너먼트(tenement·공동 주택)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시공기법상 건물을 높게 올리는 것이 힘들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이때는 단독주택의 필지를 아주 작게 분할할 수 있다. 1920년대 경성의 근대적 디벨로퍼들은 이 방법을 선택했다. 한옥은 공법상 3~4층 이상으로 짓기 어렵다. 또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면서 조선인들의 경제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됐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이 요구하는 주택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디벨로퍼들은 대형 한옥을 매입해 작은 규모 (10~30평대)로 분할한 후 작은 집들을 대량으로 공급했다.

이런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지금 북촌과 익선동에서 볼 수 있는 한옥집단지구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한옥들이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서 만들어진, 20세기 초반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퓨전 주택’이다. 익선동, 정확히는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는 과거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 소유로, ‘누궁동’이라 불리는 대저택이었다. 이를 기농 정세권 선생이 1920년대 매입해 토지를 분할한 뒤 그 위에 여러 채의 한옥을 개발해 오늘에 이르렀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