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남쪽 도시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폴 세잔의 아틀리에. 2017년 여름. 사진 장우철
프랑스의 남쪽 도시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폴 세잔의 아틀리에. 2017년 여름. 사진 장우철

지난 계절에 맑은 날을 골라 폴 세잔(프랑스 화가)의 아틀리에(작업장)에 도착한 적이 있다. 가방 속에 사과를 한 알 넣어 간 것은 겉멋이든 속멋이든 아무튼 멋을 내느라 그런 거였다. 세잔의 아틀리에에 얼마쯤 머물다 밖의 정원에 앉아 사과를 하나 먹는 일 따위, 그만큼의 멋.

세잔의 아틀리에에서 제법 오래 머물렀다.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어디서 왔니, 처음 세잔을 알게 된 게 언제니’라고 말을 붙일 만큼 죽치다시피 했다. 거기에 사과가 있었다. 사과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조금 오래 생각했더랬다.

어렸을 적, 귤을 먹지 못하는 입맛을 지닌 탓에 자연스레 사과 대장이 됐다. 나는 고르게 썰어 포크와 함께 주시던 외숙모의 사과도 좋아했지만, ‘그냥 먹어도 돼’ 하며 쓱쓱 옷자락에 문질러 주던 친구의 사과나 청바지 무릎 위에서 쩍 쪼개 주던 동네 형들의 사과도 좋아했다.

후지와 국광, 홍옥, 초여름의 아오리. 사과마다 제 이름이 있음을 알게 될 때쯤 사과는 갑자기 달라져버렸다. 세상의 모든 사과가 일제히 한 가지로 변해버린 듯했다. 모양도 맛도 다르지 않고 온통 같았다. 나는 그걸 ‘새 사과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설마 어딘가엔 옛 사과가 아직 열리고 있겠지.

나는 그 어떤 사과만을 찾기 시작했다. 본능적이었다. 알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먹고 싶어서, 철을 섬세하게 나눠 경동시장에 갔다. 안동 길안면에도 가고, 양구 펀치볼에도 가고, 괴산 연풍면에도 가고, 나제통문을 지나 무주 설천면에도 갔다.

내가 점점 사과에 관해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사과의 크기였다. 손아귀에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 움켜쥐고 씨앗이 드러나도록 야무지게 먹을 수 있느냐는 문제. 점점 그런 사과를 찾게 됐다. 하지만 맛있는 사과에 대한 정보는 있어도 작은 사과에 대한 얘기는 영 헷갈리고 어려웠다.

그러다 이런 말을 들었다. “여태 사과를 먹었어도 이런 사과는 츰 먹어 보네. 하나 깎아주래?” 지난 1월에 논산 집에서, 엄마는 거실에 누워 있는 내게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답을 들을 것도 없이 사과를 가져다 깎기 시작하셨다. “꿀도 안 들고, 크기도 요만한데 어째 요론 맛이 난다냐.” 나는 막 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작은 사과를 보았다. 방금 전 쌀겨 속에서 꺼내왔다고 상상했다. 예산에서 온 사과라고 했다.

얼마 후 나는 서울 통의동에서 전시를 열었다. 거기에 쓰려고 그 사과를 세 상자 주문했다. 관람객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사과의 위치를 바꾸거나, 하나 쓱 먹거나, 가져가거나 하길 바라면서 그것을 테이블에 놓아뒀다. 그리고 누군가 “이것은 말하자면 세잔의 사과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럽게 웃었다.


▒ 장우철
‘DAZED KOREA’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2018 HOUSE OF SEOUL’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