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의 2018 F/W 컬렉션은 제주 해녀에게 영감을 얻었다. 사진 프린
프린의 2018 F/W 컬렉션은 제주 해녀에게 영감을 얻었다. 사진 프린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삼·전복·미역 따위를 따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여자.’ 굳이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녀를 안다. 거친 바다를 삶의 터전 삼아 물질을 하는 해녀는 우리에겐 먼 바다의 돌고래보다 더 익숙하다. 바로 그 해녀가 최근 패션쇼의 주인공이 돼 런웨이 무대에 올랐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영국이다.

2018 F/W 런던 패션쇼에서 여성복 브랜드 프린은 해녀에게 영감을 얻은 컬렉션을 선보였다. 잠수복 소재의 원피스에 그물 스타킹을 신은 모델들은 망사리와 테왁(헤엄칠 때 쓰는 두렁박)처럼 생긴 가방을 들고 워킹했다. 프린의 듀오 디자이너 저스틴 손튼과 테아 브레가지는 지난해 영국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해녀 : 바다의 여인(Haenyeo: Women of the Sea)’전을 통해 해녀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이 전시회는 사진가 김형선의 해녀 시리즈였다.

20년 가까이 상업 사진가로 활동해온 김형선은 자전거 여행차 우연히 들른 제주도 우도에서 해녀를 보고 그때부터 줄곧 그들을 쫓았다. “물질을 끝내고 뭍으로 올라와 앉은 할머니가 허리의 납을 풀고 조끼를 벗는데, 그 모습이 저한텐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가까이에서 해녀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어요.”

갓 물질을 마친 듯 축축한 볼엔 수경 자국이 선명했고, 턱 끝에선 짠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패션은 또 어떤가. 오렌지색 혹은 검은색 고무옷 위에 추위를 막기 위해 덧입은 꽃무늬 조끼, 고운 빛깔의 토시와 장갑, 알록달록한 양말과 고무신…. 제 몸뚱이만한 망사리와 테왁을 어깨에 척 걸치고 긴 작살을 움켜쥔 이들의 모습엔 생의 고단함과 아름다움, 강인한 정신이 깃든 빛나는 아우라가 있었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그 사진 속의 해녀 자체가 한국의 패션이었다.

패션은 디자이너들의 철학을 담은 작품이기 이전에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이자 표현의 도구다. 그리고 우리 생활의 일부다. 화려한 패션쇼는 머나먼 별나라 얘기 같지만 사실 우린 매일 옷을 입고 산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밥 먹듯 옷을 만드는 패션 디자이너들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2015년 구찌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가 된 직후 다음과 같이 각오를 밝혔다. “개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저만의 패션쇼를 구축하고 싶어요. 당신이 옷을 입는 방식은 당신이 세상을 읽는 방식이자 느끼는 방식이며,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즉 당신의 선택이죠.” 실제로 미켈레는 자신을 둘러싼 가장 작은 세계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수집한다. 옷장 속에 소중히 보관해온 빈티지 의상들, 거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가구 커버. 심지어 그는 자신이 키우던 애완견들의 침대 위에 놓아둔 19세기 장미 프린트 린넨을 구찌 백의 안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베트멍의 수장이자 발렌시아가의 아트 디렉터인 뎀나 바잘리아는 패션계의 마르셀 뒤샹으로 불린다. 그는 싸구려 공산품과 하이 패션을 기가 막히게 조합한다. 물류회사 DHL의 로고를 새긴 베트멍 티셔츠는 40만원 가까운 가격에도 불티나게 팔렸다. 이케아의 장바구니 프락타 백을 본떠 소재만 가죽으로 대체한 발렌시아가의 쇼퍼 백은 또 어떤가. 병 뚜껑을 단 벨트, 빅 라이터로 부츠의 굽을 대체하고 양말과 신발을 하나로 합쳐버린 삭스 슈즈도 그의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일상의 흔한 소재에서 디자인적 가치를 찾는 이 같은 패션 경향은 1970년대 이탈리아의 전위적 미술 운동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를 연상시킨다. 나뭇가지·천조각·시멘트·밧줄 등 보잘것없는 주변의 소재를 작품의 주재료 삼아 그 재료의 변형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 삶과 예술, 문명에 대한 성찰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야니스 쿠넬리스, 루치아노 파브로 등 아르테 포베라 예술가들은 “일상의 소재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은 관찰자의 눈”이라 말하며 예술가의 태도와 작업의 개념 그리고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르테 포베라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유명한 설치 작품 ‘누더기 비너스(Venus of the Rags)’는 요즘 런던의 헤롯 백화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백화점 측은 베트멍과의 협업으로 4개의 윈도에 산더미처럼 헌옷을 쌓아올렸다. 베트멍의 공동 창업자이자 뎀나의 동생인 구람 바잘리아는 과잉 생산되는 옷으로 인한 문제점을 알리고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작품을 차용했다. 디스플레이 기간에 옷을 기부한 고객들에겐 재활용 병으로 만든 베트멍의 한정판 손목시계가 선물로 돌아갔다. 기부 수익금은 영국의 아동학대 방지학회로 전달됐다.

다시 해녀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해외 패션 디자이너들은 한국의 일상적 풍경에서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한 듯하다. 앞서 언급한 프린이 제주도 바다로 떠났다면, 라프 시몬스는 농촌에 갔다. 2018 S/S컬렉션에서 비닐 우산을 쓴 모델들은 긴 스카프가 달린 모자를 착용했다. 밭일을 할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쓰는 바로 그런 모자 말이다. 라프 시몬스가 이스트백과 협업한 가방의 안감에는 ‘자연이 빚은 상주곶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김형선 ‘Yun Chunkum, Hamo Jeju 2014’. 사진 김형선
김형선 ‘Yun Chunkum, Hamo Jeju 2014’. 사진 김형선

 


패션의 진정한 의미 찾은 패션계

한때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새로운 유행을 쏟아내던 패션계는 이제 조용한 일상으로 눈을 돌린다. 풍요롭던 경제 호황기는 끝났고 옷과 장신구는 쓰레기처럼 쌓여만 간다. 패션계는 비로소 패션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마네킹이 아닌 옷을 입는 주체, 인간의 삶을 반영하고 우리가 숨 쉬는 오늘의 시대를 담는 것. 해녀 사진이 아름답게 다가왔던 건 세월의 흔적이 물때처럼 남은 그들의 모습에서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는 건 괜한 말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가 가장 개성적인 패션이다. 눈에 보이는 스타일보다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끝내주게 감각적이고 패셔너블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일단 거울 앞에 서서 자신부터 들여다보라. 그리고 사랑하라.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