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청보리밭을 한쌍의 남녀가 지나고 있다. 사진 이우석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청보리밭을 한쌍의 남녀가 지나고 있다. 사진 이우석

여행 에세이 ‘나를 부르는 숲’에서 빌 브라이슨과 그의 친구 카츠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 반대로 나는 더워지기 전에 고창을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다. 완연히 무르익은 2018년 봄의 향기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봄은 야속하다. 기나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금세 또 떠나버린다. 한국의 사계절이란 ‘오셀로(Othello)’ 칩 같아서 양면에 겨울과 여름이 있고 봄, 가을이란 그저 좁아터진 테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4월 한복판이면 어느새 끼어든 여름이 눈알을 부라릴 테다. 봄은 정말 ‘스프링’처럼 튀어 순식간에 사라질 태세다.

다행히 선운사 춘백(春柏)은 아직까진 화사하다. 미당과 송창식이 노래한 선운사에는 새빨간 동백이 피어났다. 아직 일러 작년 것만 남았대도, 또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대도 동백 보러 선운사 오르는 길은 아름답기만 하다. 여수·통영의 것과는 달리 선명한 산그늘 속 동백의 붉은 자욱이 아직 바래지 않았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 천마봉까지 오르면 ‘호남의 내금강’ 선운산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붉은 색에 눈이 시리다면 푸른 색으로 달래야 한다. 학원농장이 제격이다.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곳이다. 무릎만큼 커버린 연두색 청보리밭이 하늘 끝까지 펼쳐진다.

청량한 풍경에다 귀까지 호강한다. 보리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사각사각 서로 스치며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얇은 바람에도 한들한들 물결치는 청록의 카펫 사이로 S라인의 길을 걷는다. 운집한 군중 사이로 걷는 개선장군처럼 어깨가 으쓱하다.

별미로 유명한 고창 풍천장어구이. 사진 이우석
별미로 유명한 고창 풍천장어구이. 사진 이우석

억새와 갈대의 몸짓도 유려하다지만 보리처럼 우아하진 않다. 게다가 갈대와 억새는 무채색이 아니던가. 새파란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은 어느새 하늘로 사라져버린다. 그 아래엔 오두막이 있고 다시 왕대숲으로 내려가는 사행문(蛇行紋)의 구불구불한 길이 생겨난다.

아! 봄은 꽃길로만 오는 게 아니었구나. 파란 봄에서 육즙 가득 담은 봄을 느낀다. 그래서 청춘(靑春)이라지. 이제 곧 보리는 노랗게 물들고 햇살도 그리되리라. 그쯤 되면 학원농장은 보리를 베어내고 메밀과 해바라기를 심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보리가 손을 흔들면 봄날은 간다.’

고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프랑스 미쉐린이 발행한 여행정보서 ‘미쉐린 그린가이드’는 고창에 ‘별 3개’를 부여했다. 미쉐린 3스타 여행지인 셈이다.

세계가 주목한 보물은 고창 고인돌 유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물이 그러하듯 한반도는 수많은 선사시대 보물을 품고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dolmen)의 동양 최다 군집지역도 바로 한반도, 그중에서도 전라남북도 일대다. 고창군에만 약 2000기의 고인돌이 모여있다. 지난 2000년에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수많은 고인돌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쯤 청동기인들이 조성했다. 고창읍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에만 48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가장 완벽한 ‘북방식 고인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도산리 고인돌’이다. 판석을 받친 고임돌의 높이가 무려 1.6m에 달하는 청동기 거석문화의 표본이다.

인구밀도가 높고 수많은 전화(戰禍)를 겪은 한반도 땅에서 이 모습 그대로 무려 3000년의 시간을 버텨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선 이 같은 고인돌의 가치에 대해 꼼꼼히 배울 수 있다. 만약 자녀가 있다면 가족 여행지로 딱이다.

완벽한 북방식 고인돌의 모습을 간직한 ‘도산리 고인돌’. 사진 이우석
완벽한 북방식 고인돌의 모습을 간직한 ‘도산리 고인돌’. 사진 이우석


습지 걸으면서 심신 정화

전국이 걷기여행붐이지만 고창 걷는 길에는 색다른 매력이 있다. 갯벌이 펼쳐진 바다로부터 산과 습지를 돌아나오는 코스다. 고창의 자연 속에는 넉넉한 생명의 습지가 있다. 람사르 협약에 의해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오베이골 운곡습지는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생태계를 오롯이 간직한 산지형 저층습지다. 창녕 우포늪과 같은 내륙 습지 형태로 지하 용출수가 뿜어져 나와 습지를 이룬다. 이곳 습지에는 삵, 붉은배새매, 수달, 황조롱이 등 희귀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습지를 훼손하지 않고 관광객들이 대자연을 즐길 수 있도록 총 3.4㎞의 코스 중 일부 구간에 나무데크를 설치했다. 뭔가 설치를 했기 때문에 인공적이란 이야기도 듣지만 모름지기 에코 트레일 코스란 직접 땅을 밟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습지를 둘러보고 고인돌 유적까지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동양 최대 크기의 운곡 고인돌까지 때묻지 않은 자연을 벗 삼아 쉬어가며 심신을 정화할 수 있다.

‘고인돌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운곡서원을 거쳐 장살비재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용기를 좀 더 낸다면 다시 할매바위~병바위~선운사 인근 풍천(복분자·풍천장어길), 소요사~질마재~죽염공장(질마재길)을 돌아 선운사~도솔암~소리재~갯벌체험마을~좌치 나루터로 해서 끝이 나는 장장 100리의 걷기 코스로 이어진다. 연두색 습지 길을 걷다 보면 봄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고창읍 도산리 고창고인돌박물관은 기원전 8세기 이전부터 축조된 고인돌과 선사시대의 생활에 대해 디오라마와 영상자료 등으로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잘 갖춰놓았다. 입장료 어른 3000원. 월요일 휴관. (063)560-2577~8.

심원면 심원염전은 갯벌 염전체험이 가능한 곳으로 3~10월 오후 소금을 내는 풍경이 멋들어지는 곳이다. 해가 질 무렵 염전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낙조는 덤이다.

심원면 수궁회관은 간장꽃게장으로 유명한 집. 한약재를 넣어 짜지 않고 달달한 간장에 알까지 고소한 맛의 암꽃게를 넣어 담근 게장맛도 일품이지만 곁들여 나오는 말린 망둥어포와 묵은 김치맛 또한 일품이다. (063)564-5035.

뭐니 뭐니 해도 고창 최고의 먹거리는 풍천장어. 산지라 해도 자연산을 취급하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중 고창읍 용궁회관은 자연산 장어를 초벌 구이한 상태로 철판에 올려주는데 양식에 비해 기름기가 적어 더 쫄깃하고 맛에 질리지 않는다. (063)562-6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