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S클래스. 사진 메르세데스-벤츠
벤츠 S클래스. 사진 메르세데스-벤츠

서울 북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 요즘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주 출몰한다. 여기 이사 온 4년 전만 해도 주차장에서 한두 대 마주치는 게 전부였는데, 요즘은 10여 대가 넘게 주차돼 있다. 우리 아파트뿐 아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벤츠의 세 꼭지 별 엠블럼을 자주 목격한다. 벤츠가 왜 이렇게 자주 보일까.

2월 7일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2017년 판매 실적을 공개하고 올해 계획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이 자리에서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사장은 지난해 6만8861대를 팔아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국내 수입차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연간 6만 대 이상을 팔았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모델별 수입차 베스트셀러를 보면, BMW 520d가 9688대를 팔려 1위를 차지했지만 3~5위는 모두 벤츠 E클래스였다. 역시, 요 몇 년 동안 대한민국 곳곳에서 벤츠를 자주 마주쳤던 것엔 이유가 있었다.

“나, 차 바꿨어.”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C클래스야.”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이었다. “요즘 C클래스가 모델 체인지를 앞두고 프로모션을 크게 하거든. C200 아방가르드가 5000만원대 중반인데 800만원을 할인받으니까 4000만원대 중후반에 살 수 있더라고.” 친구의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반짝 전구가 켜졌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 벤츠가 많아진 비밀이 풀린 기분이었다. 4000만원대 중반이면 옵션을 그득 담은 그랜저와 비슷한 값이다. “그랜저 살래? C클래스 살래?”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단순히 프로모션만으로 이런 실적을 거둘 순 없다. 브랜드에 대한 신뢰와 좋은 이미지가 바닥에 깔려 있지 않다면 아무리 프로모션을 해대도 소용 없다. 이런 면에서 벤츠는 그동안 한국에서 신뢰와 이미지를 잘 쌓았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도로에 다니는 벤츠 모델의 번호판에 이런 글귀가 써 있는 걸 발견했을 거다. ‘The Best or Nothing.’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말은 벤츠의 신조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이 벤츠가 어떤 제품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벤츠는 최고의 차를 만든다’고 세뇌시킨다.

친구는 C클래스를 고른 이유 중 하나로 ‘하차감’을 들었다. 차에서 내릴 때의 기분 말이다. “벤츠를 타는 선배 차에 동승한 적이 있는데 주차하려고 기계식 주차장에 차를 세웠더니 관리하는 아저씨가 반색을 하며 나오는 거야. ‘사모님 어디 오셨냐?’고 하면서. 내가 쏘나타를 타고 갔을 땐 흘끗 쳐다보고 말더니.”

생각해보면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6년 전인가. C클래스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가 차선을 바꾸려고 방향지시등을 켰는데 주변에 있던 차들이 길을 열어주는 모세의 기적을 경험했다. 지금은 벤츠가 많아져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방향지시등을 켰을 때 끼워주지 않으려고 바짝 붙는 차는 거의 없다. 벤츠를 타면 이런 걸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랜저 대신 C클래스를 사는 이유가 십분 이해가 된다.

어찌 보면 벤츠는, 아니 벤츠 코리아는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잘 이용했다.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C클래스나 S클래스나 모두 똑같은 벤츠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엔 ‘벤츠 = 비싼 수입차’라는 생각이 박혀 있다. 그러니까 돈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C클래스로 벤츠를 타는 우쭐함을 맛볼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E클래스나 S클래스는 왜 그렇게 많이 팔리는 거냐고. 폴크스바겐발(發) 디젤 스캔들로 국내에서 아우디가 차를 제대로 팔지 못하고 있는 지금, 벤츠의 경쟁 상대는 BMW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경쟁자가 아쉽게도 벤츠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7시리즈 가운데 가장 좋은 모델을 탔는데 S클래스 중에서 가장 낮은 모델보다 못한 것 같아요.” 지난달 BMW 760Li와 벤츠 S400d를 시승한 후 후배가 한 말이다.

물론 메르세데스-벤츠가 잘나가는 게 한국 시장에서만은 아니다. 벤츠는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228만9344대를 팔아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브랜드에 올랐다. 2016년에 이어 2년 연속 왕좌에 오른 셈이다. 이 기록만 놓고 보면 벤츠가 원래 잘나가는 브랜드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005년 1위 자리를 BMW에 내준 후 2011년엔 2위 자리마저 아우디에 내주는 처지가 됐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반격이 시작된 건 2015년부터다. 아우디를 누르고 2위에 오른 벤츠는 2016년엔 BMW마저 제압하고 1위에 올랐다.

S클래스의 실내 디자인. 사진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의 실내 디자인. 사진 메르세데스-벤츠


유일한 경쟁자 BMW 제압

벤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왕좌를 되찾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모델에 있다. 작은 해치백부터 최고급 세단, 대형 SUV, 고성능 스포츠카까지 벤츠에는 없는 모델이 없다. 하나의 라인에서도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이 있다. C클래스만 해도 쿠페와 컨버터블에 왜건과 AMG 모델까지 있다. 남해안 죽방렴처럼 촘촘히 라인업을 짜 소비자를 가두겠다는 벤츠의 전략은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벤츠 전시장에 가면 세 꼭지 별 엠블럼을 단 모든 종류의 차를 만날 수 있다. 작은 해치백을 원하면 A클래스를, 중형 SUV를 원하면 GLC나 GLE로 가면 된다. 벤츠 코리아가 지난해 세운 6만8861대라는 기록은 글로벌 판매 순위 6위에 해당한다. 한국은 중국,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에 이어 메르세데스-벤츠가 많이 팔리는 시장이 됐다. 뛰어난 품질과 이미지에 사람들의 신뢰와 하차감이 이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분간 벤츠의 고공행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서인수
모터트렌드 코리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