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 레인지로버 이보크 시트에는 53개의 재활용 페트병이 사용됐다. 사진 랜드로버
신형 레인지로버 이보크 시트에는 53개의 재활용 페트병이 사용됐다. 사진 랜드로버

며칠 전 친구와 약속이 있어 스타벅스에 갔다. 별생각 없이 주문을 마치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점원이 묻지도 않고 일회용 컵에 커피를 담아줬다. “저, 안에서 마실 건데요.” 내 말에 새하얀 마스크를 쓴 점원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당분간 매장에서도 일회용 컵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일회용 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마스크를 턱밑에 내리고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빨대는 바뀌지 않았다. 스타벅스커피코리아는 2018년부터 전국 매장에서 플라스틱 대신 종이로 만든 빨대를 쓰고 있다. 조금이나마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들은 2017년 빨대 사용량이 1억8000만 개 남짓이었지만 종이빨대 도입 후 월평균 750만 개로 크게 줄었다고 흐뭇해했다. 플라스틱 사용량뿐 아니라 빨대 사용량까지 반으로 낮춘 셈이다.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애쓰는 기업은 스타벅스뿐만이 아니다. 나이키는 올해 초 플라스틱 물병과 티셔츠 등을 재활용해 얻은 직물로 만든 새로운 운동화를 선보였다. 아디다스 역시 해안 지대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한 폴리에스터로 100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만들고 있다. 자동차 회사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열심히 플라스틱 줄이기에 앞장서는 회사가 자동차 회사가 아닐까 싶다. 점점 엄격해지는 환경 규제에 대응하고,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조금이라도 씻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우디는 2월 25일 새로운 A3를 공개하면서 재미있는 보도자료를 덧붙였다. ‘A3 한 대의 시트에 최대 45개의 1.5L 페트병이 사용됐습니다.’ 그렇다고 페트병을 갈아서 시트를 만들었단 뜻은 아니다. 재활용 페트병을 잘 말리고 녹인 다음 인조섬유와 섞어 실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은 시트는 물론 바닥 매트나 도어 안쪽 등을 장식하는 직물로 완성된다. 아우디는 신형 A3의 바닥 매트에도 62개의 페트병을 재활용한 직물을 사용했다. 트렁크 바닥이나 도어 안쪽에도 이 직물을 덮었다. “아직 시트 전체를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뒤덮진 못했지만 100%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아우디 섬유 부문 소재 개발 담당자의 말이다.

아우디는 이제 막 재활용 페트병으로 만든 직물을 모델에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랜드로버는 일찌감치 재활용 페트병에 주목했다. 신형 레인지로버 이보크 시트에는 53개의 재활용 페트병이 사용됐다. 두 가지 직물 시트 가운데 덴마크 섬유 디자인 전문회사 크바드라트(Kvadrat)의 프리미엄 직물이 바로 페트병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내구성이 좋은 울 혼방 소재와 재활용 페트병으로 만든 다이나미카(Dinamica) 스웨이드를 조합해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시트를 완성했다. 다이나미카 스웨이드는 메르세데스-벤츠(이하 벤츠)도 즐겨 쓰는 소재다. 언뜻 알칸타라와 비슷하지만 티셔츠나 페트병, 재활용 플라스틱 등에서 뽑아낸 폴리에스터 섬유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벤츠가 ‘CES 2020’에서 공개한 자율주행 콘셉트카 비전 AVTR도 다이나미카 스웨이드를 두른 시트를 얹었다. 새하얀 가죽 표면을 부드럽고 매끈하게 다듬어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벤츠 관계자의 설명이다. 미래적인 느낌이 물씬한 이 시트는 나이테처럼 생긴 무늬를 넣어 자연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준다.

포드 역시 재활용 소재에 무척 관심이 많은 브랜드 중 하나다. 이들은 2013년 퓨전에 재활용 페트병으로 만든 직물 시트를 얹을 만큼 재활용 소재 사용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 포드는 연간 12억 개 이상의 플라스틱병을 재활용해 자동차 부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재활용 방법은 이렇다. 분리 수거된 플라스틱병을 잘라 녹인 다음 다른 섬유와 섞어 자동차 부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본 플라스틱 조각으로 재구성한다. 그다음 이 조각으로 F-시리즈 트럭의 휠 라이너나 모든 포드 모델에 적용되는 언더보디 실드(underbody shield)를 만드는 거다. 포드는 플라스틱병으로 재활용한 자동차 부품은 단단하면서도 가벼워 특히 보디 아래쪽이나 휠 아치 등에 붙였을 때 공기역학도 좋게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포드는 2030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없애고, 2035년까지 모든 제조 공장에서 100%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목표도 발표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아우디 A3, 메르세데스-벤츠 비전 AVTR, 볼보 XC60. 사진 각 사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아우디 A3, 메르세데스-벤츠 비전 AVTR, 볼보 XC60. 사진 각 사

시트는 물론 행사장서도 ‘플라스틱 OUT’

2년 전 볼보는 2025년까지 자동차 제조 과정이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탄소 중립’ 공정을 정착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신차에 적용되는 플라스틱의 25%를 재활용 소재로 대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활용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모델도 선보이겠다며 XC60 T8의 스페셜 모델을 공개했다. 겉모습은 기존 XC60과 같지만 재활용 소재를 품은 모델이다. 센터콘솔은 낚시용 그물과 로프를 재활용해 얻은 섬유와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바닥과 바닥 매트는 재활용 페트병과 면에서 얻어낸 섬유로 만들었다. 보닛 안에는 구형 볼보에서 떼어낸 시트로 만든 흡음재도 넣었다.

볼보 스웨덴 본사는 2018년부터 사무실은 물론 신차 발표 행사장에서도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금지했다. 이런 움직임에 맞춰 볼보자동차코리아도 지난해부터 사무실은 물론 전시장과 서비스센터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금지하고 친환경 종이나 펄프, 나무 등 자연 분해가 가능한 친환경 소재로 대체했다. 지구를 걱정하는 착한 마음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고 애쓰는 건 박수 받을 일이다. 그리고 앞으론 직물 시트도 마냥 우습게 보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