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로 공연이 중단된 1999년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폭우로 공연이 중단된 1999년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여름은 페스티벌의 계절이다. 지난해까지는 그랬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모든 페스티벌을 앗아갔다. 잊힌 계절이 된 것이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자각하니, 이 땅에 첫 록 페스티벌이 열렸던 그때를 돌아보게 된다. 무모한 여름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록의 황금기였다. ‘건스 앤 로지스’와 ‘메탈리카’가 1980년대를, ‘너바나’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1990년대의 영웅이었다. 지금의 10대, 20대가 힙합에 열광하듯, 한 반에 몇 명씩은 록 마니아가 있었다. 신촌과 대학로의 LP 바는 그런 음악 애호가들의 소굴이었고 매달 말이 되면 학교 앞 서점에는 록 음악 전문지가 깔렸다.

그런 시절을 겪고 자란 이들의 소망은 한국에서 록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1969년 미국에서 열린 전설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공연 영상을 마치 신의 언행처럼 돌려보고, 잡지에 소개되는 레딩,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화보를 낙원의 풍경처럼 바라본 이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금지된 것에는 환상이라는 부가가치가 따르는 법.

1990년대 중반 홍대 앞에서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 인디 음악이 탄생하며 한국에도 밴드 붐이 불었고 이 환상은 계속 커졌다. 그 꿈은 1999년 7월 이뤄졌다. ‘딥 퍼플’ ‘드림 시어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프로디지’ 등 당대의 밴드들이 한꺼번에 한국에서 공연하는 인천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이 열린 것이다. 주말의 클럽 공연이 끝난 후에는 밴드건 관객이건 삼삼오오 모여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는 난민들처럼 트라이포트에 대한 기대감을 터뜨리곤 했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7월 30일, 송도 시민 공원으로 향하는 내내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언제 쏟아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과 동시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폭우가 됐다. 땅은 금세 뻘밭으로 변했다. 배수 시설은커녕 잔디도 제대로 깔려있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무대엔 이렇다 할 천장도 없었다. 비가 고스란히 무대로 쏟아졌다.

첫날 라인업은 ‘딥 퍼플’ ‘드림 시어터’ ‘김종서’ ‘시나위’ ‘매드캡슐마켓’ ‘애쉬’ ‘윤도현밴드’ ‘크래쉬’ ‘자우림’ ‘크라잉넛’ ‘노이즈 가든’. 1970~90년대를 총망라하는 팀들이었지만 국내 밴드 중 실제 공연을 한 팀은 크래쉬가 유일했다. 폭우로 다 취소되고 그나마 해외팀들의 공연도 지연과 중단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나 기획자들만큼이나 이 땅의 첫 록 페스티벌에 벅차오른 관객들은 ‘드림 시어터’와 ‘딥 퍼플’의 공연을 기다렸다. 발이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신발은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 폭우로 공연을 중지시키려는 진행 요원을 제지한 채 노래를 계속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고두고 회자할 ‘딥 퍼플’의 무대를 끝으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첫날 공연은 끝났다. 캠프촌 역시 물바다였지만 모두가 젊은 시절이었다. 젖은 옷을 말리지도 못하고 흙투성이가 된 몸을 씻지도 못하고 잠들다니, 제대로 우드스톡의 히피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장대비는 드럼 소리만큼이나 우렁찼다. 그래도 설렘은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면 어쨌든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과 ‘프로디지’라고!” “그 형들도 우리 행색을 보면 기특해서라도 앙코르 두 곡 정도 더 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냥 비가 아니었다. 한강 다리가 넘치느니 마느니 하는 폭우였다. 텐트촌에는 새벽에 비상 대피령이 떨어졌다. 결국, 취소 공지가 났다. 오랜 열망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나 허탈한 끝이었다. 마치, 록의 신이 한국을 버리는 듯했다.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은 꿈을 꿨던 이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단순히 시대를 앞서간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때의 처절한 실패가 7년 후인 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트라이포트의 악몽을 현지에서 겪은 이들, 그 악몽을 직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이들 모두 반신반의했다. ‘스트록스’ ‘프란츠 퍼디넌드’ ‘플라시보’ ‘블랙 아이드 피스’… 화려한 라인업이었다.

장소도 인천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첫날 아침 비가 내렸다. 온종일 내렸다. 지긋지긋했다. 1999년, 일찍이 이 록의 불모지에 내렸던 신의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공연이 끝나면 잦아들다가도 다른 공연이 시작하면 쏟아지기 일쑤였다. 폭우 시에도 공연을 할 수 있는, 거의 건물이라 할 수 있는 무대 덕에 기상 상황 때문에 공연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버티는 건 오직 관객의 몫이었다. 모두가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은 채 비를 맞고 진흙을 걸었다. 힘들지만 마치 록의 신이 내린 시련을 이겨내고 가호를 얻겠다는 듯, 모두가 무대 앞을 지켰다.

첫날 헤드라이너였던 ‘스트록스’ 때, 그 시간에 가장 강한 비가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낮에 비하면 남아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떠난 이들의 몫까지 열정을 전했다. 밴드도 감명했다. 보컬 줄리언 카사블랑카는 예정에 없던 노래를 부른 것도 모자라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폭우 속 관객들과 함께하겠다는 듯 물병을 자기 머리에 쏟았다. 공연이 끝나고 퇴장하던 드러머 파브리지오는 걸음을 멈추고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말로 뚜렷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 한국식 인사법은 마치 록의 신이 전하는 감사 같았다. 거짓말처럼, 다음 날부터 날이 개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다 끝난 후, 퇴장하라는 진행요원들의 지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빅 톱 스테이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청춘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끔 간절하게 떠오르는 축제의 기억

가끔 그때 생각을 한다. 1999년과 2006년의 여름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 비를 맞으며 그 뻘밭에서 어떻게 뒹굴 수 있었을까.

결핍 때문이었다. 제한된 정보와 제한된 기회는 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만으로 키우고 구체화했다. 옛날 사람들이 유토피아와 엘도라도를 상상했듯, 우리도 우드스톡 이야기를 들으며 페스티벌이 음악의 이상향이자 애호가들의 공동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행도 쾌락이 될 수 있고 편의는 사치라 여겼다. 그랬기에 그 열악한 상황에서 수레 앞에 뛰어드는 사마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들이 깔아 놓은 판에 앞뒤 안 가리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노는 세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페스티벌이 산업이자 여가가 되기 전, 록 음악 팬들이 느꼈을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이 폭우와 태양의 여름 벌판에서 소음과 함성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LG트윈스나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한국 시리즈 우승을 바라는 마음과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