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트라우마인 항해 공포증을 극복하고, TV 쇼에서 퇴장하는 트루먼(짐 캐리). 사진 IMDB
평생의 트라우마인 항해 공포증을 극복하고, TV 쇼에서 퇴장하는 트루먼(짐 캐리). 사진 IMDB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내 의지대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불현듯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날이 있다.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지지만, 누구나 자각과 변화의 시간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계절의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면 신기할 것도 없는 것처럼, 의심의 눈을 뜨지 않으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섬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트루먼에게는 시리우스 별자리라고 적혀 있는 조명기구가 눈앞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것이 신호탄이었다. 다음 날, 그는 이십여 년 전 바다에 빠져 죽은 줄 알고 있던 아버지와 마주친다. 그런데 사람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고 아버지를 강제로 데려간다. 자동차 라디오에서는 교통방송 대신 트루먼의 상황을 생중계하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멀쩡하게 개어 있던 하늘에서는 굵은 비가 쏟아진다. 그것도 트루먼의 머리 위로만. 세상이 미쳐버린 것일까, 내가 미쳐버린 것일까, 트루먼은 혼란에 빠진다.

진실의 문 앞에 서게 될 때,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외면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고야 말겠다며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트루먼은 아마도 익숙한 세계가 전부라 믿으며 모른 척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깊이 감춰놓은 송곳은 본성을 드러내며 심장을 찔러대기 마련이다. 

트루먼은 대학 시절 스치듯 만났지만, 사랑을 느꼈던 실비아를 떠올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이트했던 바닷가에서 “그들이 곧 올 것”이라며 불안해하던 그녀는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세상이 모두 너를 알아. 이 모든 건 너를 위해 만든 세트장이야. TV 쇼라고!” 트루먼은 이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할 것 같다. 어떻게 이토록 커다란 의심을 가슴에 묻어둔 채 지난 십 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올 수 있었을까?

트루먼은 세계적인 리얼 다큐 TV 프로그램의 주인공이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 트루먼만 자신이 그 드라마의 등장인물이라는 걸 모른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촬영이 시작됐고 태어나는 순간 친모가 양육권을 포기했는지, 방송국에 입양됐다. 그 후 서른 살 생일을 앞둔 지금까지 트루먼은 출연료 한 푼 받지 못하고 세트장에 갇혀 그것이 진짜 세상인 줄 알고 살아왔다.

트루먼을 뺀 모든 사람, 행인은 물론 직장 동료와 친구, 부모와 아내까지, 다만 인기를 바라며 돈을 받고 출연하는 연기자일 뿐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트루먼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보면 소름 끼치도록 고통스러운 진실이다. 그런데도 제작자와 출연자들은 트루먼의 인생이야말로 ‘각본 없는 진짜 인생, 숭고한 삶’이라고 광고한다. 

트루먼의 세계를 창조한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기로 유명한 연출가 크리스토프. 그는 우주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세트장을 지어놓고 그 안에 달과 태양, 바다와 섬을 만들었다. 카메라 5000대를 곳곳에 설치해 트루먼의 생활을 시시콜콜 24시간, 전 세계 220개국 17억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탄생과 첫걸음마에 박수를 보냈고 첫 키스에 환호했으며 화면에 나오는 협찬 상품을 기꺼이 구매하고 즐겁게 소비한다. 

완전한 통제와 속임수란 불가능하다. 최고의 기술과 치밀한 계획, 철저한 보완 작업을 추구한다 해도 넓은 세트장 이곳저곳은 녹이 슬고 나사가 풀리는 시간의 마모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빗물과 별의 추락이 아니더라도 트루먼의 아버지처럼 배역에서 잘린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고, 실비아처럼 이 모든 것이 쇼라는 것을 트루먼 앞에서 폭로하는 사고도 벌어졌다. 그 결과 풍랑으로 아버지를 잃은 탓에 항해 공포증이 있던 트루먼은 비로소 바다 건너 세상의 진실을 찾아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아버지를 봤다고 해도 어머니는 놀라지 않고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내는 앨범을 펼쳐 보이며 트루먼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가를 상기시킨다. 친구조차 스트레스 때문에 착각하는 거라며 믿어주지 않는다. 트루먼은 진실을 말해준 유일한 사람, 실비아를 찾아 떠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비행기도, 버스도 갖은 핑계를 대며 그를 태우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달리면 병목 현상이 생기고 산불과 가스 누출 사고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절망해서 돌아온 트루먼은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다독이는 친구의 조언이 그럴듯한 대사일 뿐이라는 걸 느낀다. 조난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이제야 돌아왔다며 재등장한 아버지가 자신을 끌어안아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트루먼은 감독과 시청자가 원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연기한 뒤 수천 대의 카메라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트루먼이 떠날 리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간 트루먼을 발견하자 용서할 수 없다는 듯 거센 바람과 파도를 일으킨다. 자신의 피조물이니 자기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고 생각한 그는 마치 신처럼 말한다. “이 세상만이 진짜야. 넌 여기에서만 행복할 수 있어.” 그러나 트루먼은 외친다. “날 막으려거든 차라리 죽여!”

결론은 해피엔딩 같지만, 영화 밖으로 나와 생각해보면, 평생을 세트장이라는 온실에서 살았던 트루먼이 바깥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얻은 자유인 만큼 열심히 살아가리라, 행복을 찾으리라 믿고 싶다.


짐 캐리가 유쾌하게 풀어낸 무거운 주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피터 위어 감독이 1998년에 발표한 영화다. 웃음이 잘 어울리는 짐 캐리가 트루먼 역을 맡아 무거운 주제가 담긴 작품을 시종 밝고 유쾌하게 이끌어간다. 시청률만 높일 수 있다면 개인의 희생쯤은 아무래도 좋다는 잔혹성,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관음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나는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일까, 돌아보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일까? 내 삶은 진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이 질문의 정답은 “세계는 하나의 무대이며 인생은 연극과 같은 것, 모든 사람은 배우”라고 쓴 셰익스피어의 문장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한구석, 지구라는 작은 무대에서 태어나 연극의 막이 내릴 때까지 맡은 역할을 열연하는 것, 현재라 불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그 답을 찾아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가치 있는 인생, 진짜 사람, 트루먼(Truman)으로 사는 길이 아닐까. 그리고 언제 무대에서 내려와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굿 모닝,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