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사진 엔니오 모리코네 오가니제이션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사진 엔니오 모리코네 오가니제이션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7월 6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모리코네는 낙상으로 대퇴부 골절상을 입어 고향 이탈리아 로마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날 새벽 영면했다. 영화 ‘불의 전차’ 작곡가 한스 짐머(1957년생)가 “우상은 영원하다”라며 고인을 추모했고, 영화감독 박찬욱은 “모리코네 음악을 듣지 못한 사람은 문명사회에 없다. 그는 분명 현대의 J.S 바흐”라고 거장을 기렸다.

모리코네는 1980년대 이후 존 윌리엄스(1932년생), 짐머와 더불어 ‘영화 음악 3대 거장’으로 꼽혔다. 1979년 ‘천국의 나날’을 시작으로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가 아카데미상 음악상 후보에 올랐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이미 2007년 아카데미가 평생공로상을 수여했지만 모리코네는 여든 중반에도 ‘아카데미 음악상’에 목말랐다.

모리코네는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와 손잡았다. 타란티노는 영화 ‘헤이트풀 8’에서 마카로니 웨스턴의 암울한 분위기를 의도했고, 모리코네는 영상을 보지 않고도 바순과 튜바 등 저음역 관악기를 써서 중후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현했다. 팔순 노장이 선곡과 녹음, 지휘를 직접 관장하는 동안 데카 레이블은 체코 국립 교향악단을 섭외해 작곡가의 의욕을 ‘클래식’ 콘셉트로 지원했다. 마침내 2016년 모리코네는 5전 6기 만에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이후 모리코네의 행보는 사실상 은퇴 수순에 준했다. ‘60주년 기념 앨범’ 투어를 2017년 시작해 지난해 여름까지 유럽 20여 개 도시에서 이어 갔지만 콘서트의 대부분이 회고전 성향의 로드쇼였다. 모리코네는 2019년을 끝으로 영화 음악 제작과 대외 활동을 중단했고, 말년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이중주곡을 쓰면서 여생을 정리했다. ‘세기적 영화 음악 거장’이 돌아간 길은 결국 자신이 처음 걷고자 한 ‘절대 음악(musica assoluta)’인 클래식이었다.


만년의 모리코네는 영화 음악 작곡을 은퇴하고 클래식으로 전향했다. 사진 엔니오 모리코네 오가니제이션
만년의 모리코네는 영화 음악 작곡을 은퇴하고 클래식으로 전향했다. 사진 엔니오 모리코네 오가니제이션
엔니오 모리코네는 2011년 내한공연에서 뮤지컬 스타 옥주현을 협연자로 만났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엔니오 모리코네는 2011년 내한공연에서 뮤지컬 스타 옥주현을 협연자로 만났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모리코네는 타란티노 영화 ‘헤이트풀 8’로 2016년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모리코네는 타란티노 영화 ‘헤이트풀 8’로 2016년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대중적 작품들 ‘모리코네 사운드’로 곁에 남아

1928년 로마 태생의 모리코네는 재즈 트럼펫 연주자이기도 한 부친 마리오의 영향으로 음악을 시작했고 미군 클럽에서 재즈 트럼펫을 불었다. 17세에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해 작곡과 지휘법, 합창 지휘를 배웠고, 1956년 수석 졸업과 동시에 마리아 트라비아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했다. 1954년부터 59년까지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을 작곡했고 아방가르드 작곡으로 유명한 존 케이지 문하에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이탈리아 주요 뮤지션들과 즉흥 연주 그룹 ‘그루포 디 임프로비사치오네 누오바 콘소난차(Gruppo di Improvvisazione Nuova Consonanza)’를 결성해, 트럼펫과 플루트 연주를 맡았다. ‘미션’ 삽입곡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오보에’의 구성진 멜로디는 모리코네의 탄탄한 관악 경력에 힘입었다.

모리코네는 무엇보다 본인 음악이 음악가에 의한 자유로운 자기표현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결과물을 ‘사운드 트랙(colonna sonora)’이 아닌 ‘영화를 위한 음악(Musica per il Cinema)’으로 칭해줄 것을 바랐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작곡가 히사이시 조도 같은 주장을 편다. 모리코네는 ‘태양은 가득히’의 니노 로타(1911~79),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헨리 맨시니(1924~94)가 세운 이탈리아계 영화 음악의 독자적 위상을 ‘일 포스티노’의 루이스 바칼로프(1933~2017)와 함께 21세기에도 최상의 위치에 머물게 했다. 1960년대 음악적 역량과 명성을 근 60년 가깝게 유지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모리코네만큼 오랜 기간 사랑받은 작곡가의 존재는 이제 존 윌리엄스 정도다.

들으면 흥얼거리게 되는 모리코네의 대중적 작품들은 공연 업자들에겐 금맥이었다. 해외에서 100인조 악단을 들여 지휘대에 모리코네가 서면 회당 4억~5억원 개런티(출연료)가 시세였다. 2005년 서울월드컵경기장 공연으로 추진된 모리코네 첫 내한도 이 가격대였다. 부대 경비를 책임지지 못한 기획사 부실로 2005년 내한은 취소됐지만, 이후 선금-중도금-잔금으로 개런티를 결제하는 팝의 유통 방식으로 세 차례 방한이 이뤄졌다. 오케스트라가 콘서트홀에서 반주를 하면서 클래식의 외형을 띠지만, 돈이 오가는 형태와 규모로 보면 철저히 대중음악 테두리에서 소비됐다. 2011년 세종문화회관 공연에서 뮤지컬 스타 옥주현이 모리코네 지휘의 협연자로 등장해, 마이크를 쓰는 장면이 해당 공연의 성격을 증명한다.

이제 모리코네는 없지만 우리 곁에는 ‘모리코네 사운드’가 남았다. 생전의 모리코네는 스크린에 화면을 띄우고, 무대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필름 콘서트’ 방식을 꺼렸다. 그러나 ‘시네마 천국’에서 중년이 된 소년 토토가 흘러간 필름을 보면서 영상 기사 알프레도를 떠올리는 장면을 무대에서 구현한다면, 방법은 ‘필름 콘서트’가 최적이다. 모리코네 유족이 ‘필름 콘서트’ 판권을 어떻게 행사할지 공연 기획자들의 관심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