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적 있는 다자이 오사무는 맹장염 수술로 복막염을 일으켰을 때 진통제로 사용했던 파비날에 중독돼 정신병원에 수용된 적이 있다. ‘인간 실격’은 그때 받았던 정신적 충격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창살 달린 병원과 그 안에 수용된 환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포감, 믿었던 아내와 스승이 자신을 속이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사실에서 오는 극도의 불신감, 더욱이 병원에 수용됐을 당시 아내가 자신과 가까웠던 어느 화가와 불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데서 받은 충격이 상당했다고 하는데, 그녀와 함께 시도한 음독자살에서 아내만 죽고 자신은 살면서 스스로를 향한 자기혐오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인간 실격’은 어느 한 미달한 인간이 살아온 이력을 그가 남긴 수기를 통해 전달하는 얘기다. 이 기묘한 수기는 어느 부적응자의 비참한 삶과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종에 대한 환멸과 자조, 분노와 공포라고 해야 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실패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실패한 시대의 역사에 가깝다. 그 시대는 물론 패전 후 일본이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기인하고, 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 나타나는 파멸의 미학을 읽어 내는 가장 오래된 해석이자 가장 미화된,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미화된 시선이다.

‘나’는 이런 미화된 해석을 불편해하는 쪽에 가깝다. 그는 혼자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자살 시도와 죽음에 이른 다섯 번째 자살에는 모두 그의 아내를 비롯해 그와 함께한 여성이 함께했다. 네 번째에는 그의 아내만 죽었고, 다섯 번째에는 둘 다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결코 혼자 파멸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그의 의지는 그의 가까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때 그와 함께 죽음을 결심한 여성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렬하고 또 자발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자신을 거부하고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행위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타인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면, 그의 자살에는 얼마간 타살이 포함된 것 아닐까. 이를 패전 후 일본의 자의식에 비춰, 내가 망했으므로 세상도 망해야 한다는 공멸의 세계관으로 읽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내가 승리하지 못했으므로 경기 자체를 무효화하고 싶어 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이라면 지나친 오독일까.

스물일곱의 청년을 마흔이 넘은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문장은 요조가 남긴 수기의 마지막 문장이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자살한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사람들이 예상했던 그의 나이는 마흔 살 이상이었고, 다자이 오사무는 마흔 살이 되기 바로 전 해에 죽었다. 마흔 살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숫자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이인 마흔에 미치기 훨씬 전에 그가 자기 죽음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그에 맞춰 살아가던 요조의 은밀한 복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을 속이며 사람됨을 연기했던 자신을 놓아 버리기에 사람들이 예상하는 마흔에 훨씬 미치지 않는 나이에 죽음을 ‘완성’하는 일은 그동안 인간을 혐오하면서 인간을 연기했던 자의 마지막 복수였던 것이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나’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으나 그는 결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끝내 타인과 이어질 수 없었다.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인간에 대한 미칠 듯한 공포를 숨긴 채 익살스럽고 조금 별난 아이로 완성된 텅 빈 인간과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깃든 깊은 간극. 말하자면 열세 살의 간극. ‘스물일곱과 마흔’은 끝내 세상과 불화한, 끝내 연결되지 않은 자신과 세상의 깊은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조의 수기 앞뒤를 이 수기를 읽은 어느 관찰자의 서문과 후기가 감싸고 있다. 후기의 마지막, 그러니까 이 소설의 진짜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수기가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과 진짜 자신의 차이에 대해 말하면서 끝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완전한 끝 역시 타인이 말하는 요조에 대한 언급으로 끝난다. 그가 살았던 곳은 스스로 유폐되기를 자처한 타인의 지옥이었다. 읽을 때마다 소름 끼치는 이 파괴적인 소설은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들끓는 파괴와 멸망의 욕망이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나를 소름 끼치게 한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다자이 오사무(だざいおさむ)

1909년 일본 아모오리현 쓰가루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부끄러움을 느꼈던 다자이 오사무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고 나서 한동안 좌익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0년 연인인 다나베 아스미와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홀로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 혐의를 받고 기소 유예 처분됐다. 1935년 맹장 수술을 받고서 복막염에 걸린 그는 진통제로 사용하던 파비날에 중독된다. 같은 해에 소설 ‘역행’으로 아쿠타카와상에 응모했으나 차석에 그친다. 그는 이 심사에 불만을 품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항의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듬해 파비날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데 이때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그의 작품은 일본 젊은이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다자이 오사무는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를 잡는다. ‘인간 실격’은 퇴폐의 미학과 파멸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정점으로 손꼽힌다. 1948년 연인과 함께 다마가아 수원지에 투신해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