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프 판 즈베던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 모습. 사진 크리스 리
야프 판 즈베던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 모습. 사진 크리스 리

미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뉴욕 필)은 3월 9~19일 중국·일본·대만에서 7회 공연을 했다. 신임 음악감독 지명자 야프 판 즈베던(Jaap van Zweden)이 지휘자로 나섰다.

애초 내한 공연도 추진됐지만 무산됐고, 판 즈베던만 따로 방한해 3월 22·24일 경기 필을 객원 지휘했다.

뉴욕 필은 2000년대 이후에만 여섯 번 내한 공연을 가졌을 만큼 국내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세계적인 연주단체다. 그동안의 한국 공연은 과거 빈 필, 베를린 필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불리던 시절을 기억하는 올드 팬들이 주 타깃이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사장 박삼구) 주최로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올해 내한 공연이 무산된 건 뉴욕 필 공연의 제작비를 맞추기 위한 기업 펀딩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기 오케스트라임에도 기업의 후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적자가 불 보듯 뻔한 프로젝트를 끝까지 고수할 이유는 없다. 역설적으로 금전 손실을 감수하면서 꾸준히 뉴욕 필 내한을 이어온 금호아시아나의 저력을 돌아보게 되는 사례다.

올해 들어 해외 유수 오케스트라들이 한국을 점점 외면하고 있다. 2017년 서울과 수도권에 약 17개 해외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지만, 올해는 10개 남짓에 그칠 전망이다. 올 1분기 서울의 클래식 메인 공연장인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선 해외 오케스트라 공연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1월 바르샤바 필 공연만 눈에 띌 뿐이다.


중국의 국립극장격인 베이징 국가대극원의 외관. 사진 국가대극원
중국의 국립극장격인 베이징 국가대극원의 외관. 사진 국가대극원

런던 필 신년 음악회 베이징에서 매년 개최

반면 같은 시기 중국을 찾은 해외 연주단체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았다.

런던 필, 크레메라타 발티카, B·ROCK 오케스트라, 스베틀라노프 오케스트라, 뉴욕 필,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 덴마크 내셔널 심포니가 중국을 찾았다. 이들 모두 베이징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에서 공연했다. 우리나라의 국립극장 격인 국가대극원은 2007년 완공됐다. 세계 최대 규모 공연장으로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 드라마센터를 갖추고 있다.

같은 시기, 일본 도쿄 산토리홀엔 BBC 심포니, 카피톨 툴루즈 오케스트라 정도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제 아시아 오케스트라 시장의 메카는 도쿄 산토리홀이 아니라 베이징 국가대극원이다. 1986년 개관한 산토리홀은 음향과 프로그램, 영향력 등에서 ‘아시아 최고’로 인정받아 왔다.

2010년대 중반부터 해외 오케스트라는 한·중·일과 대만·홍콩·마카오를 아우르는 ‘아시아 투어’ 대신, 중국 본토만으로 계획한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이후 할레 오케스트라, 버밍엄 심포니 등 영국 오케스트라가 중국 단독 투어에 특히 열성적이다. 런던 필은 거의 매년 신년 음악회를 베이징에서 열고 있다.

지명도가 높은 유명 오케스트라의 중국 투어 공연 증가가 특히 두드러진다. 런던 필하모닉은 거의 매년 신년 음악회를 베이징에서 열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손을 내민 곳이 중국이었다. 재정 지원이 절실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2011년과 2015년을 제외하고 2010~2017년 매년 중국에서 공연했다. 2012년부터는 시즌 프로그램에 중국 투어를 당연시하도록 아예 ‘중국 레지던시’라는 이름으로 현지 정기 공연을 하고 있다. ‘중국 레지던시’를 희망하는 오케스트라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뿐이 아니다.

현재 베이징 국가대극원, 상하이 동방예술중심(오리엔털아트센터), 상하이 그랜드시어터, 광저우 오페라하우스, 하얼빈 오페라하우스, 톈진 그랜드시어터, 창샤 콘서트홀, 우한 퀸타이 콘서트홀이 유럽 중급 이상의 오케스트라 투어를 유치하고 있다. 본거지의 일정을 10일간 이상 비우기 어려운 유럽·미주 오케스트라의 특성상 6회가량 중국에서 공연을 하면 굳이 한국과 일본을 찾지 않아도 수지를 맞출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빈체로·크레디아·마스트미디어 등 국내 대형 공연 수입·기획사들은 1~2년 전 아스코나스홀트(Askonas Holt), 해리슨패럿(Harrison Parrott), IMG아티스트 런던(IMG Artists London), 인터무지카(Intermusica) 등의 런던 주재 투어 매니지먼트나 중국 주재 투어 에이전시 우프로모션(Wu Promotion) 등과 거래하면서 오케스트라의 내한을 추진한다.

오케스트라에 따라 투어 매니지먼트를 두지 않고 직접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서거나 브로커를 두고 한국 공연을 타진하기도 한다. 보통 오케스트라와 프로모터 사이에서 공연을 성사시키면 거래 금액의 15% 내외에서 투어 매니지먼트사는 수수료를 챙긴다. 서울 공연이 무산되면 보통 수도권과 지방 공연장으로 눈을 돌리는 게 기존 관행이었다.


국내 기업들 공연 후원 주저해

뉴욕 필을 비롯해 빈 필, 베를린 필,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런던 심포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등 초일류 해외 악단의 내한 기본 조건은 서울 공연 2회다. 2회 공연 제작 비용을 어느 기업이 채울 것이냐에 따라 공연의 성패가 좌우된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으로, 후원금의 30~50%를 기업에 티켓으로 제공하면서 타이틀-메인-서브 스폰서십으로 제작비를 충당한 포트폴리오가 무너진 것도 한몫했다.

기업 입장에서 고가 티켓을 확보하지 못하면 오케스트라 내한 상품에 매력을 찾기 어렵다. 현대카드는 ‘슈퍼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시카고 심포니,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빈 필 내한을 주최했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대형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다.

이제 재벌 그룹과 유통·금융지주, 정보기술(IT) 등 각 분야의 대표 기업들도 선뜻 내한 공연 후원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내한 공연 후원 대신 해외 명문 오케스트라의 현지 지원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2010년대 초반부터 런던 부동산에 집중 투자하는 중국 레인우드(Reignwood)그룹과 타이핑보험(Taiping Insurance)이 런던 심포니의 메인 스폰서에 합류했다. 중국 주류 그룹 우랑예(Wuliangye)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해외 공연 후원 계약을 했다. 뉴욕 필이 중국 ‘춘제(春節)’에 맞춰 축하 공연을 열듯이 중국 기업의 후원을 끌어들이는 기획 공연이 유럽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전 ‘객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