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대공비.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대공비.

1956년 모나코 공국 레니에 3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할리우드 여배우에서 모나코의 대공비(大公妃)가 된 그레이스 켈리(1929~82)는 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왕실의 견제를 받았다. 시아버지 폴리냑 공작을 제외하면 시어머니 샤를로트 공주, 레니에의 누나 앙투아네트 모두 켈리를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못 하는 외국인에 평민 출신으로 왕실 예법에 무지한 켈리는 말 그대로 ‘굴러온 돌’이었다.

켈리의 탈출구는 자선과 예술 후원이었다. 자신이 총재로 있는 모나코 적십자사에서 날아오는 편지를 읽고 회신을 지시하는 게 공비의 임무였다. 자신이 조직한 모나코 가든 클럽의 행정을 책임지면서 공국 내의 약자 보호를 위해 헌신했다. 모나코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고 휴양과 도박 시설 사이사이에 어린이와 빈자, 노인을 위한 복지 시설 건립을 이끌었다.

1964년 세운 그레이스 공비 재단은 198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켈리가 사망한 다음, 현재 큰딸 카롤린(1957년생) 공주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레이스 공비 재단은 설립 초기, 공예 산업을 장려하고 모나코 여성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공예센터 ‘부티크 드 로셰’를 만들었다. 아울러 1975년부터 무용, 클래식 분야에 유망한 청년 후원 활동으로 활동 폭을 넓혔다. 국립발레단장 강수진, 유니버설 발레단장 문훈숙이 다닌 모나코 왕립 그레이스 발레학교도 이 재단이 만들었다. 그레이스 공비 아일랜드 도서관은 켈리의 혈족인 아일랜드 문화 자료를 망라한 허브로 정기적인 심포지엄을 열면서 모나코 시민이 고인을 추억할 계기를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모나코 왕실은 고급 예술을 내치에 활용했다. 19세기 중반 니스에서 모나코로 이어지는 철도가 완공된 이후 카롤린 공주는 모나코 경제 부흥 계획을 추진했다.

독일의 바트홈부르크의 카지노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프랑수아 블랑을 영입해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타운 조성을 맡겼다. 블랑의 구상대로 예술적 건축물이 거리에 들어찼고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가 1874년 모나코를 대표하는 몬테카를로 가극장을 완성했다. 북유럽 귀족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나코로 내려가 낮에는 도박을 즐기고, 밤에는 가극장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보면서 예술적 소양을 길렀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공연 모습. 사진 한정호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공연 모습. 사진 한정호

19세기 후반 모나코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과거의 좋았던 시절)를 이끈 건 공국 최초의 미국인 공비, 앨리스 하이네(1858~1925)였다. 하이네는 몬테카를로 극장장에 저명한 예술 행정가 라울 갱스부르를 임명해 푸치니 오페라 ‘제비’, 라벨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을 비롯해 프랑스 주요 작곡가의 오페라 초연을 모나코에서 가졌다. 20세기 초반에는 발레도 모나코에서 만개했다. 희대의 흥행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주도로 파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발레단 ‘발레뤼스’는 1911년 몬테카를로로 본거지를 옮겼고, 니진스키 ‘장미의 정’을 비롯한 명작 발레를 모나코에서 초연했다.

1929년 디아길레프의 사망 이후 오랜 침체를 겪은 모나코 발레를 일으켜 세운 곳은 왕실이었다. 켈리가 생전에 여러 차례 재건을 꾀했지만, 번번이 불발로 그친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정식 부활을 큰딸 카롤린이 1985년에 완수했다. 모친의 권유로 어려서 발레를 배운 카롤린뿐 아니라 카롤린의 동생 스테파니 공주도 격년으로 열리는 대형 댄스 마켓인 모나코 댄스 포럼의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발레에 대한 왕실의 깊은 애정을 입증했다.

특히 카롤린 공주는 몬테카를로 발레단 창립자이자 몬테카를로 필하모닉의 회장, 프랭탕 데자르 페스티벌의 행정을 감독하면서 모나코 문화 정책 수립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최고 위치에 있다. 양친의 장점을 골고루 물려받아 카리스마와 우아함이 대외 행사에 그대로 묻어난다. 카롤린의 메세나(Mecenat·문화 지원) 철학은 어머니의 앙가주망(Engagement·사회 참여) 정신에 기반한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발레가 소수의 부호를 위한 유흥이 아니라 전 계층이 과거 발레뤼스의 영화를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는 사회 참여의 확신이 정책과 인사로 나타난다. 2019년도 모나코 예술 분야 예산은 7100만유로(약 940억원)로 전년보다 11%가 증가했다.

미국에서 연극배우를 꿈꾼 켈리는 배우 수업 이전부터 발레를 익혔고, 카롤린 공주는 피아노와 플루트를 공부했고 장래 희망은 무용수였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재창단을 선포할 때 카롤린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의 곁에는 발레뤼스 정신의 현대적 계승에 적합한 프랑스의 또래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요(1960년생)가 있었다.

마요는 1992~93시즌부터 몬테카를로 발레단으로 건너가 발레단을 21세기 초반 가장 성공한 신흥 발레 단체로 격상시킨 주역이다. 6월 12~1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내한공연을 하는 몬테카를로 발레단 ‘신데렐라’는 마요식 고전 해체의 정점이다. 클래식과 발레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지식으로 카롤린은 몬테카를로 필하모닉과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한국 공연을 할 수 있기까지 성장한 데 대해 국내 공연지 인터뷰에서 자긍심을 표했다.

예순을 넘긴 카롤린 공주가 꿈꾸는 모나코의 이상적인 예술상은 동화에 가깝다. 음악과 무용, 극작과 미술이 장르를 뛰어넘어 초월적인 경지에 이르는 표현의 장을 꿈꾼다. 그러나 21세기의 모나코 왕실이 지난 세기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처럼 각 장르의 거장을 한꺼번에 모으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모나코가 예술에 투자하는 이유는 21세기에도 왕정 체계를 유지하면서 지속해서 번영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영국 왕실이 인종과 문화 다양성을 고려한 성혼으로 동시대인의 지지를 끌어내듯, 모나코는 공화정 국가가 이루기 어려운 극한의 예술적 허영에서 영원히 살길을 찾고 있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 & 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