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용 셰프. 사진 목금토식탁
이선용 셰프. 사진 목금토식탁

고미정
메뉴 이천쌀밥정식, 간장게장정식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79-4
영업 시간 매일 11:30~21:30


초록과 강이 끝없이 흐르는 계절, 소르르 한여름이 열렸다. 만남은 부쩍 다시 가물고 시간은 늘 그렇듯 인내 없이 흐른다. 동시 같은 햇살이 이마에 부딪힌다. 타박타박 문밖을 나선다. 청포도처럼 맺힌 볕은 콧잔등 위를 구르다 가슴 사이로 사라진다. 걷다가 걷는다. 푸른 이파리를 가득 피워낸 연희동 안산 자락, 담장 높고 지붕 넓은 저택들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연륜이 지긋한 주택을 개조해 운영 중인 한정식 식당, ‘고미정’. 세 글자를 가만히 소리 내 읽으니 어느 여인의 이름을 읊조리는 것만 같다. 경기도 이천에서 생산되는 아끼바리 품종 쌀로 돌솥밥을 지어, 지난 22년간 이천 지역에서 ‘고미정쌀밥집’을 운영해온 창업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현재는 연희동으로 옮겨 대를 이어 운영 중인데, 기쁨이 퍼지는 동네라는 뜻의 연희(延禧)동의 잔잔하고 은은한 운치와도 제법 잘 어울린다. 활짝 젖혀진 대문을 통해 돌계단을 오른다. 대청마루처럼 넓은 밥상 앞에 앉아 있는 그녀가 나를 맞이한다. 정오처럼 선명한 눈동자와 아침 이슬을 갓 털어내고 나온 듯한 풀잎 같은 미소와 함께.

합정동에 있는 쿠킹 스튜디오 ‘목금토식탁’을 운영하는 셰프, 이선용. 2018년부터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마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으며, 요리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일주일에 3일만 일해 한가할 것 같다고? 모르는 소리! 직접 물레를 돌려 그릇을 만들고,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날마다 다른 네 가지 코스의 조리법을 짜고, 식재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장을 보고, 일일이 혼자 밑반찬 준비를 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맞이해서 시연과 교육과 서비스를 하고, 영업이 끝나면 설거지와 청소는 물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반려 식물들까지 살뜰하게 돌보는 그녀다.

“꼭 엄마 밥 같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열다섯 가지 이상의 각양각색 음식이 상을 가득 채운다. 간장게장, 조기구이, 제육볶음, 김치전, 가자미 무침, 청포묵 무침 등. 속보다 손발이 편한 대로 이것저것 욱여넣고 비벼 먹는 일상을 보내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 이만한 보신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 가짓수가 많은 만큼 양념은 적게 간은 심심하게 맞추고, 화학조미료로 맛을 쉽사리 내지 않고, 제철 재료를 주로 찬으로 내는 만큼 선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루 두 번씩 반찬을 만든다.

갓 지은 따끈한 돌솥밥이 상에 오른다. 창밖에 열기가 들끓지만, 찬밥은 싫다. 차디찬 찻물에 말아 먹을지라도 찬밥은 싫다. 갓 지어져 상 위에 오르는 하얀 쌀밥만큼 안달 나게 하는 게 있을까. 밥 짓는 집의 굴뚝 연기처럼 피어나는 증기, 엄마 품에서 나는 편안한 향처럼 안식을 주는 밥 냄새에 허기가 딸꾹질처럼 올라온다. 급속과 과속을 모르는 우직한 재래식 돌솥으로 15분간 지은 밥을 설설 섞어 밥공기에 따로 담는다. 돌솥에 뜨끈한 물을 부으니, 공들여 눌린 두툼하고 구수한 누룽지 쌀알이 부풀어 오르면서 누런 황금빛 숭늉을 우린다. 


고미정의 간장게장정식. 사진 김하늘
고미정의 간장게장정식. 사진 김하늘
고미정 식당 테이블에 놓인 간장게장정식. 사진 김하늘
고미정 식당 테이블에 놓인 간장게장정식. 사진 김하늘

요리에 빠진 쾌락주의자…희열 찾아 직업 바꿔

뜨거운 밥 한술을 후후 불어 한입, 푸성귀를 된장에 푹 찍어 먹으며 그녀는 말한다. “저는 타지 생활을 오래 해 늘 엄마 밥이 그리웠어요.” 그녀는 이화여대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외국계 투자은행인 BNP 파리바 페레그린의 증권분석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학교(NYU)에서 경영학 석사과정(MBA)을 마치고 10여 년간 객지에서 생활했다. 뉴욕의 대형 증권사인 메릴린치에서 채권, 위험 관리 부서에서 일하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위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짓밟는 것이라는 걸 몸소 겪으며 배웠다. 

억대 연봉의 20대 금융인. 누구보다 경쟁을 즐기며 승부사 기질도 다분했다. 하지만 치졸함과 비겁함을 무기로 타인의 몰락을 자신의 성취로 얻으며 계속 현재를 이어가야 할 동기를 그녀는 그 일에서 찾지 못했다. 그녀를 웃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퇴근 후 저녁 식사를 직접 요리해 먹거나, 친구들을 초대해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누는 것.

당장 뉴욕에 있는 유명 요리학교인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ICC)에 등록했다. 하얀 조리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퇴근 후 꼬박 5시간을 서서 뜨거운 열기 아래 무거운 집기를 다루고 오감의 촉을 곤두세우며 완벽한 요리를 창작하는 학교생활이 힘에 부치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시름을 말끔히 비워낼 수 있었다. 그녀는 요리를 자신만의 명상이라 말한다. 

“어쩌면, 저는 쾌락주의자예요.” 그녀는 간장게장의 집게다리 관절을 두 손으로 딸깍 부러뜨리며 말했다. 그러곤 게딱지를 아자작 씹어 짭조름한 간장 물을 야무지게 빨아 먹으며 황홀경에 빠진 듯하다.

그녀는 줄곧 엄마 밥상의 그리움과 한식에 대한 유난한 애착을 달고 살았다. 요리학교 졸업 작품으로 호박죽, 돌솥비빔밥, 시금치 된장국, 보쌈, 갈비찜 등 여섯 가지 코스를 만들어 내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미쉐린 가이드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뉴욕의 유명 북유럽 음식점인 ‘아쿠아빗’, 뉴욕의 유명 프랑스 음식점인 ‘코르통’ 등에서 셰프로, ‘미니바 바이 호세 안드레스’ ‘아테라’ 등 음식점에서는 소믈리에로 일하며 음식이 주는 다양한 기쁨을 탐색하고 창조하고 향유했다.     

“희열을 만끽하는 순간을 꼭 기억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요.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식당에 들어올 때보다 나설 때 사람들의 표정이 곱절은 더 행복한 걸 볼 수 있었어요. ‘목금토식탁’이 존재하는 이유죠. 그나저나 게딱지는 제가 먹어도 되죠?” 철마다 연평도에서 공급받는 꽃게에 대추와 배로 은은한 단맛을 낸 간장양념으로 담근 게장. 게딱지를 접시 삼아 노란 알과 내장, 그 어떤 비린 맛 없는 양념에 뜨끈한 쌀밥을 착착 비벼 한입 가득 두 볼을 부풀리는 그녀, 짜릿하도록 달뜬 모습에 게딱지를 괜히 내주었나 침샘이 솟구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덕분에 일상에 애착이 가요. 제 생에 이런 일이 두세 번은 더 있을 텐데, 그때쯤이면 저도 고위험군에 속하는 노인이 되어 있겠죠? 건강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더 많은 분이 요리를 통해 일상을 회복하고 인생의 체력을 다지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더 쉽고 다양하게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요리뿐 아니라 와인, 허브 등 식재료를 직접 경험하는 프로그램을 늘려나가며,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밥(집밥)’ 영상을 제작 중이다.

초록과 강이 끝없이 흐르는 계절, 우리는 나뭇가지 그늘 아래 탈피한 꿈을 남겨두고 햇빛을 향해 걸었다. 소르르 한여름이 열렸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라이스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