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회화·조각·건축 등 르네상스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꽃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아름답다. 14~16세기에 걸쳐 일어난 세계 최고의 문예부흥 운동, ‘르네상스’. 그런데 왜 하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피렌체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을까.
1200년대 후반 이탈리아 반도는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 그리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나폴리 왕국과 밀라노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고 피렌체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반면 베네치아는 이 둘 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다시 말해 밀라노나 베네치아에서는 총독이나 황제가 주교를 임명해 종교와 세속 정치가 한 몸으로 통일됐었지만 피렌체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대신 성직자와 상인(나라를 통치하는 새로운 세력) 간에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을 다른 도시보다 경쟁적으로 먼저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르네상스는 나중에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말이다. 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고대 로마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했다. 전 유럽에 흩어져 있던 황금이 피렌체로 들어오면서 1300년 초반부터 피렌체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양모무역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피렌체 상인들은 오래전에 지어져 낡은 수도원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낌없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이들의 관심사는 바로 사후 세계에 있었다. 현세에서 모든 걸 이룬 부자 상인들은 죽을 때 수도원 지하에 묻혀있는 수호성인들의 유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안장되기를 바랐는데 이 성인들이 최후의 심판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해 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재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원이나 성당에서도 당시 성직자에게만 허용했던 묘지를 평신도인 부자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기 시작했고 그 보답으로 상인들에게 묘지 안쪽 기도실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수도원과 성당 벽면은 하나씩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부자 상인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또 수도원은 예술품들로 채워지면서 변화된 이 공간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신앙심을 견고히 다질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상인과 성직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르네상스 예술은 봄을 맞아 활짝 피어올랐다. 더욱이 주문이 몰리는 화가들은 공방을 운영하는 등 예술분야에서도 경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경쟁이다. 베네치아가 정치와 종교가 한 몸인 탓에 갈등도, 경쟁도 없이 신을 향한 예술품을 계속 만들면서 아직 중세시대의 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피렌체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갈등을 해결해 나가면서 경쟁을 통해 예술의 발전을 이뤄냈다.
한편 수도원의 돈줄을 쥐고 있던 상인들의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초기에만 해도 기도실에 장식할 그림의 주제는 교회가 정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작품 제작비용을 대는 상인 스스로 작품의 주제를 정하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르네상스의 기본 개념인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 즉 나에게로 중심이 옮겨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는 대목임을 알 수 있다. 조토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조토가 1290~95년에 걸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에 남긴 ‘프란체스코의 생애’ 연작 28점 중에서 ‘재물의 포기’라는 작품이다. 아시시에서는 그림 왼쪽처럼 그려졌던 작품이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바르디 기도실에서는 그림 오른쪽처럼 변했다. 그림 주문자인 바르디 가문 사람들의 모습이 작품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교회도 신에서 개인으로 변하는 관점을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바르디 가문을 예로 들었지만 피렌체 르네상스 예술에서 메디치 가문을 빼 놓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안 된다. 메디치 가문이 바르디 가문보다 좀 더 깊숙이 예술 분야에 파고들어 예술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분야 인물들 교류 도운 메디치家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최대의 상인이자 노련한 정치가)’ 때부터 4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고 300년 동안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이탈리아 아니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나아가 상업·정치·종교전반에 걸쳐 피렌체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 과학자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인물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메디치 가문은 인문주의자, 음악가, 화가 등 전혀 분야가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교류하게 해 그들의 젊은 감각에서 나오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조합, 결국에는 새로움을 창출해냈다. 예를 들면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해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는 천문항법을 발견한 후, 이 방법을 응용해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것과 같은 창조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대박의 효과’를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 ‘메디치 효과’라고 부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기업들이 이를 창출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르네상스뿐 아니라 18세기 산업혁명, 20세기에는 정보화 혁명으로 거듭난 메디치 효과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로 창의적인 인재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이 인재들을 후원하는 그룹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때에는 시민이라는 창의적인 인물들이 있었고 기술, 과학이라는 후원그룹이 있었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되는 메디치 효과가 나타났다. 20세기 실리콘 밸리에서도 창의적인 인재와 자본의 후원그룹이 만나서 이룩한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우리 개인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메디치 효과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요즘은 일생에 직업을 3번쯤은 바꿔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면 그 순간부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대신, 그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냉정을 유지해야 인생의 ‘메디치 효과’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인생의 르네상스는 언제쯤 다시 오게 될까.
▒ 박현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버토리 석사, 고려대 문화콘텐츠전공 박사, KBS 교향악단 협연,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 등 공연 콘텐츠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