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풍이 주류를 이뤘던 17세기, 프랑스 음악가들은 궁중의 우아한 취향이 반영된 프랑스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장 밥티스트 륄리를 시작으로 프랑수아 쿠프랭을 지나 장 필립 라모에서 결실을 맺는다. <사진 : 위키피디아>
이탈리아풍이 주류를 이뤘던 17세기, 프랑스 음악가들은 궁중의 우아한 취향이 반영된 프랑스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장 밥티스트 륄리를 시작으로 프랑수아 쿠프랭을 지나 장 필립 라모에서 결실을 맺는다. <사진 : 위키피디아>

아프로디테가 발을 디딜 때마다 꽃처럼 피어나는 예술적인 건축물, 그 공간을 어우르는 아폴론의 음악 연주, 그곳이 어쩌면 파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 수도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도시다. 프랑스인 스스로도 ‘빛의 도시’라고 표현할 만큼 파리는 예술과 문화라는 다리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장소다. 물론 파리는 19세기 오스만 남작의 파리 대재개발 사업 이전, 창문에서 오물을 내던지는 지저분하고 어두운 중세도시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다지 청결하지 않은 지하철과 거리를 보고 놀라는 관광객을 지칭하는 ‘파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파리는 환상적인 에덴동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파리를 사랑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솟아 흐르는 그곳의 아름다운 문화 예술 때문이 아닌가 싶다.

파리가 처음부터 문화의 수도였던 것은 아니다. 15세기만 해도 파리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활동하던 르네상스의 고향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문화의 변방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곳에 시집온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에 의해 조금씩 발전하게 됐다. 그녀는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으로 1533년 프랑스로 시집오며 발레를 비롯해 향수, 심지어 포크로 식사하는 문화 등 이탈리아 상류문화와 메디치 가문의 높은 예술적 안목을 들여왔다. 이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17세기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그랑 시에클(Grand Siècle)이라는 찬란한 세기를 이룩했고, 파리는 유럽의 문화 예술을 선도하는 곳이 됐다.

당시 유럽의 궁전은 모두 파리의 베르사유궁을 주시했고 그곳에서 즐기는 모든 것은 곧바로 유행됐다. 또 이탈리아풍이 주류를 이뤘던 당시, 프랑스의 자주적인 색채를 원했던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예술계 또한 프랑스어의 운율과 궁중의 우아한 취향이 반영된 프랑스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 노력은 장 밥티스트 륄리를 시작으로 프랑수아 쿠프랭을 지나 장 필립 라모에서 결실을 맺는다.

이쯤에서 독자들에게 음악 한 곡을 추천하고 싶다. 영화 ‘왕의 춤’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의 발레 모음곡인 ‘위대한 연인’이다. 이 발레의 한 장면인 ‘아폴론 신의 등장’은 영화에서 루이 14세의 발레 공연 배경음악으로 삽입됐고 실제로도 그가 마지막으로 공연한 발레 작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곡에서 작곡가는 절대권력이 되기 위한 왕의 바람을 담아 화려한 장식음, 강렬한 리듬과 함께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음악을 펼쳐낸다. 왕에 대한 충성심 또한 지극했다고 전해지는 륄리는 이탈리아 출신임에도 왕의 총애를 얻어 프랑스 오페라 상영권을 독점하는 등 당시 음악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의 허락 없이는 프랑스에서 오페라를 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무상, 권력무상이란 말처럼 연주 중 오늘날의 지휘봉 역할을 하는 지팡이를 과도하게 흔들다 발등을 찧어 파상풍으로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영화 ‘왕의 춤’의 한 장면.
영화 ‘왕의 춤’의 한 장면.

절대 군주의 위엄, 고혹미 표현한 프랑스 음악

다음 소개할 곡은 프랑스의 바로크 작곡가 장 필립 라모(Jean Philippe Rameau)가 파리에서 작곡한 ‘클라브생을 위한 새로운 모음곡집’이다. 라모는 절대군주의 위엄을 표현한 륄리와는 달리 프랑스의 로코코적인 색채를 완성한 작곡가다. 특히 이 곡은 당시 프랑스의 예술적 취향이 극대화된, 한 시대의 건반음악을 대표하는 명작으로서 멜랑콜리가 느껴지는 세밀한 감정 표현, 당시로는 혁신적이고 풍부하며 다채로워진 화성, 사교계가 추구했던 귀족적인 우아함 등이 모두 들어 있다. 그의 곡을 듣고 있노라면 동시대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의 고상한 화폭마저 떠오른다. 또 그의 작품에서 ‘세 개의 손’ ‘닭’ ‘야만인들’과 같은 재치있는 부제와 더불어 약 300년이 지난 지금 현대인들의 감성에도 친숙하게 다가오는 다양한 창의적인 표현이 가득하기도 하다. 음악사학자들은 그의 이런 표현들이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독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이탈리아 안토니오 비발디의 음악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예술적 수준으로 올려놓았다고 평가한다. 이 곡을 들으며 300년 전 샹들리에 빛 가득한 베르사유 궁전 한편에 앉아보는 건 어떨까.

이후 파리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를 지나 쇼팽, 리스트라는 천재 피아니스트를 맞이하기도 하고 드뷔시, 라벨에서 프랑스 인상주의를 꽃피우는 등 눈부신 예술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다음 칼럼에선 이 아름다운 시대를 말하는 19~20세기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파리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샹송 ‘오 샹젤리제’가 센강을 흐르는 로맨틱한 오늘날 파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 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파리 느낄 수 있는 추천음반

장 밥티스트 륄리의 ‘위대한 연인(Les Amants Magnifique)’
지휘 : 마크 민코프스키

프랑스 고음악 전문단체 ‘루브르의 음악가’와 지휘자 마크 민코프스키의 녹음. 철저한 고증을 거친 연주법 그리고 민코프스키의 세련된 감각으로 어우러지는 연주.


장 필립 라모의 ‘클라브생을 위한 새로운 모음곡집 (Nouvelles Suites de Pices de Clavecin)’
지휘 : 알렉상드르 타로

모던 피아노가 주는 새로운 라모 작품의 가능성을 찾아볼수 있는 음반. 프랑스 바로크 원전 연주법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현대 피아노가 가진 무한한 색채의 매력을 살린 알렉상드르 타로의 음반. 라모의 건반음악이 다시 부활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