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 영국 런던에 설립된 글로브 극장. 셰익스피어의 명작들을 상연해 유명해졌다.
1599년 영국 런던에 설립된 글로브 극장. 셰익스피어의 명작들을 상연해 유명해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생가가 있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Stratford-upon-Avon)은 영국 잉글랜드의 워릭셔 주에 위치해 있다. 런던의 킹스크로스 역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걸린다. 1564년 태어나 1616년에 사망한 셰익스피어는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극작가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연구는 하루에 한 권 정도 단행본이 나오고 매년 수천 권씩 논문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활발하다. 물론 그중에는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의심하는 내용도 많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사실은 어떤 귀족이 필명으로 셰익스피어(‘창을 휘두르는 자’라는 뜻)를 사용했다고 하는 주장도 꽤 생각해 볼 만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면 옥스퍼드를 졸업했다고 하는 셰익스피어의 묘비에 고작 “흙을 건드리지 마시오”라고만 달랑 쓰여 있다거나 유산 목록에 책 한 권 발견할 수 없는 점 등은 그의 교육 수준을 의심케 한다. 위대한 셰익스피어가 그동안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가짜라고 하기엔 너무 위대한 존재라 진짜라고 믿고 싶다. 희곡 38편, 소네트 154편, 장시 2편을 남겼고 lonely, sweet sorrow(달콤한 슬픔), gloomy, hurry 같은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 사용된 2만개의 단어 중 2000개는 그가 만들어낸 언어라고 하니. 그가 살았던 16세기 영어의 위세를 고려할 때(라틴어가 영어보다 한 수 위였다) 오늘날 쓰고 있는 영어를 셰익스피어가 완성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그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이 말에 동의했다.


부인 앤 해서웨이 생가도 관광객 북적

셰익스피어는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에이번 강가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지만 장갑을 팔던 아버지가 꽤 부유했던 덕에 라틴어와 고전을 배웠다. 물론 어디까지나 셰익스피어가 생존 인물이란 걸 가정하고 하는 말이다. 18세에는 돌연 8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와 결혼하고 런던으로 떠나버린다. 1582년 결혼할 당시 앤은 이미 임신 중이었고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했다는 추측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가 잘못 선택했다고? 내가 보기에 그는 선택당한 것 같다. 타인들에게 자신의 의지가 있었다면 앤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남자들 편에서 그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26세의 그녀는 달콤하게 그를 유혹했다. 소년 아도니스를 정복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회색 눈의 여신은 자신보다 어린 그와 옥수수밭에서 뒹군 뻔뻔한 스트랫퍼드 처녀다.”

셰익스피어의 첫 번째 인기작 제목이 ‘비너스와 아도니스’였다. 비너스 앞에서 망설이는 순진한 아도니스. 셰익스피어는 자신과 앤을 이 둘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그래서 앤 해서웨이를 앤 헤이트웨이(Anne Hateaway)로 바꿔 부르며 둘의 관계를 조롱하기도 한다.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에 앤이 가엾게 느껴진다. 어쨌든 매년 6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가면 셰익스피어의 생가뿐 아니라 앤 해서웨이의 생가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셰익스피어에 관련된 제한적인 기록 때문에 그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후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7~8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갖은 고생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1590년쯤 런던에 도착한 이후에야 배우, 극작가, 글로벌 극장의 공동 소유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영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 속 인물에 있다. 인간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과 절묘한 묘사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전에 쓰인 희곡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진부하고 평면적인 인물이었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햄릿, 이아고, 리어왕을 통해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을 창조해 인간 본성을 꿰뚫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삼일치 법칙을 사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을 창작한 것도 그의 인물구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그의 습작기와 성장기 때의 작품들(‘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헨리 4세’ 등)과 4대 비극이 쓰인 원숙기 때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인물묘사가 한층 복합적으로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다. 4대 비극의 맨 마지막 작품 ‘맥베스’에서도 왕위 찬탈에 따른 처참한 결말을 겪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양심과 영혼의 타락’이라는 주제까지 녹여냈다.


원작 능가할 정도로 인물 그려낸 베르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후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줘 작품의 소재가 됐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겨울이야기’는 영화로, ‘오셀로’ ‘맥베스’는 오페라로, ‘햄릿’은 연극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버전으로 되풀이된다.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어’ 외젠 들라크루아의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레이쇼’의 그림들도 셰익스피어 작품의 또 다른 리바이벌인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를 명작으로 꼽고 싶은데, 그 역시 베르디가 그려낸 작품 속 인물묘사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맥베스가 강인한 남성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베르디의 작품 속 맥베스는 ‘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어보는 우유부단한 남성으로, 레이디 맥베스는 원작보다 훨씬 강한 욕망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당신은 코더의 영주, 위대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 게 있다면 당신의 본성이에요. 야심이 없는 게 아니라 사악한 마음이 없어요. 우아한 소망을 성스럽게 이루려고 해요.” 이 얼마나 단호한 여인인가. 베르디는 레이디 맥베스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이전 오페라와는 다르게 거칠고 무거운 소리를 가진 소프라노를 기용했고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150번이나 연습시켰다. 이 잔인무도한 레이디는 남편에게 살인을 독려하고 목표가 달성된 후에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신의 본성과는 다른 행위를 하기 위해 독하게 외칠수록 왠지 나약한 한 인간의 절박함이 읽혀 씁쓸하다.

베르디는 죽기 전까지 항상 침대 맡에 셰익스피어 작품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모두 오페라화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을 만큼 그 누구보다 셰익스피어를 사랑해서 ‘맥베스’와 ‘오텔로’ ‘팔스타프’에서는 셰익스피어를 능가할 정도로 원숙하게 인물을 그려냈다. 오페라에 연극적 장치를 수용해 중요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에게 선명한 대비 효과를 줬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오페라와 이상적으로 결합시키는 데 감각과 열정을 보여줬고 누구보다도 뛰어남을 증명했기 때문에 베르디는 ‘음악의 셰익스피어’라고도 불린다.


▒ 박현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석사, 고려대 문화콘텐츠 전공 박사,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 등 공연 콘텐츠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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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치 법칙 공연 시간과 극 중 시간의 일치, 공연 장소와 극 중 장소의 일치, 실제 행위와 극 중 행위의 일치를 말한다. 2시간 동안의 공연 시간에 가능한 24시간 이내에 벌어진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동시성(同時性)을 높인다. 18세기까지 독보적인 원칙으로 활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