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만든 곡 작품번호(Op.)118은 함부르크의 저녁 노을과 어울리는 음악이다. <사진 : 위키피디아>
브람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만든 곡 작품번호(Op.)118은 함부르크의 저녁 노을과 어울리는 음악이다. <사진 : 위키피디아>

7년 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유학하던 때였다. 배우고 싶은 곡이 무엇인지 묻는 은사님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브람스의 6개 피아노 모음곡 작품번호(Op.) 118”이라고 대답했다. 은사님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직 이 곡을 이해하기에 자네는 너무 어리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몇 주간 조른 것도 모자라 “젊은 사람의 감성도 이 곡을 표현하기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제자의 고집에 선생님도 결국 브람스의 Op.118을 허락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이 곡과의 만남이 내가 지금 사는 브람스의 고향 독일 함부르크와 첫 만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곡을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수백 시간 동안이 매 순간 의문투성이였고 어려움에 계속 절망을 느껴야 했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은 옛 대가의 음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와 너무 달랐다. 브람스의 Op.118은 정말 20대 중반 젊은이가 연주하기엔 너무 어려운 곡이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곡은 브람스가 말년에 자신이 걸어온 긴 인생의 모든 순간을 자전적인 시각으로 단순한 형식 안에 농축해 낸 간결한 시 한 편과 같다. 그가 죽기 4년 전인 1893년 작곡된 이 곡은 6개의 짧은 곡으로 구성돼있는데, 바흐의 대위법, 고전적 형식, 후기 낭만 화성 등 그가 오랫동안 연마한 작곡 기법과 함께 사랑, 감사, 인내, 초조함, 좌절, 절망 등 그가 겪었던 모든 감정이 뒤섞여있다. 이 곡은 또 브람스가 늘 그리워했던 그의 고향 독일 함부르크의 자연을 회상하며 그려낸 곡이라고도 전해진다. 특히 두 번째 곡은 목가적인 선율로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곡을 혈기 왕성한 에너지로만 채워 넣으려고 했으니 진실한 음악은 당연히 내게서 더 멀어졌을 수밖에 없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독일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
독일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

브람스 자신의 인생을 압축한 시 같아

겸손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자책하던 차에 선생님은 두 번째 곡을 가르치며 나중에 저녁노을이 지는 함부르크 항구에 한 번 가보라며 당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의 말씀을 건네셨다. 2년이 지난 후 나는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브람스의 고향으로 이사했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노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함부르크 날씨는 살이 에일 것 같은 거친 바닷바람에 해가 뜨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아 현지인마저도 틈만 나면 햇볕을 찾아 남쪽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몇 주 동안 구름이 잔뜩 찌푸린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날, 연습을 끝내고 항구로 저녁 산책을 나갔다. 그곳엔 머리 바로 위로 나지막이 펼쳐진 저녁노을이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맑은 하늘의 노을과는 아주 달랐다. 그저 수많은 구름이 머리 위에 낮게 내려앉아 빨강, 주황 물감을 조용히 머금고 저 먼 대륙에서 온 화물선을 묵묵히 맞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은 더 수줍게, 수더분하게 브람스의 음악을 나에게 노래하고 있었다. 이 항구에 내려앉은 노을은 그 옛날 먼바다에 나가 거친 날씨와 싸우고 타협하고 순응해야만 했던 함부르크 사람들에게 지친 영혼의 안식을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동안 함부르크 노을과 브람스 음악은 내 곁을 맴돌았을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만 보고 해석하려 한 무례한 욕심으로 내가 보지 못한 것일 뿐이었다. 브람스의 음악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지친 내 영혼에게 건네는 음악임을 이제야 깨닫다니.

독일 함부르크의 저녁 노을은 대부분 맑은 하늘이 아니라 짙은 구름에 드리운다. <사진 : 위키피디아>
독일 함부르크의 저녁 노을은 대부분 맑은 하늘이 아니라 짙은 구름에 드리운다. <사진 : 위키피디아>

물론 지금도 Op.118은 나에게 쉬운 곡은 아니다. 하지만 음악이 먼저 나를 찾아올 때까지 겸손히 기다리자고 마음먹은 그날 이후로는 더 많은 존경과 감동으로 곡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노을 지는 저녁 시간 브람스의 Op.118을 들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이 곡을 감상할 때는 음악이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내 마음은 뭐라고 답하는지 귀 기울여보길. 음악을 손으로 움켜잡으려 했던 나같이 욕심으로 그 조용한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길 바란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브루크에 어울리는 음반

브람스 6개의 피아노 모음곡 Op. 118
브람스 6개의 피아노 모음곡 Op. 118

피아니스트ㅣ빌헬름 캠프
발매 연도ㅣ1964년 1월 1일
레이블ㅣ도이체 그라모폰

독일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자인 빌헬름 캠프가 연주한 브람스의 작품번호 118 음반이다. 브람스 음악을 막 접한 젊은 연주자라면 임종을 앞둔 브람스를 떠올리며 슬프고 느리게 이 곡을 연주할 지 모른다. 그런데 빌헬름 캠프가 연주한 이 곡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볍고 심지어 즐겁기까지 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필자에게 브람스를 가르쳐준 선생님도 이 곡을 가르쳐주실 때 “더 가볍게, 더 행복하게 연주해보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