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왼쪽)’과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2’ <사진 : 위키피디아>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왼쪽)’과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2’ <사진 : 위키피디아>

“오프라 윈프리가 클림트의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2’를 지난해 여름 중국 컬렉터에게 1억5000만달러(1700억원)에 팔았다.”

지난 2월 9일자 블룸버그 뉴스에 세계 미술계가 경악했다. 이 작품은 2006년 크리스티 옥션에서 8790만달러(1000억원)에 익명의 응찰자에게 팔린 후 잊혔다. 그가 윈프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10년 후 이 작품을 팔아 700억원의 이익을 남겼다. 70%의 수익률이다. ‘포브스’는 윈프리의 재산을 29억달러(3조3000억원) 정도로 추정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작품에 앞서 그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은 2015년에 상영된 영화 ‘우먼 인 골드(The Woman in Gold)’의 주인공이다. 우먼 인 골드는 히틀러가 이 작품을 몰수한 뒤 바꾼 제목이다. 초상의 주인공 아델레의 남편은 오스트리아의 설탕 재벌이었다. 이 유대인 부부는 예술을 사랑해 클림트와 작곡가 쇤베르크 등 많은 예술가들을 집에 불러 예술을 논하거나 음악회를 열었다.


남편 블로흐 바우어가 조카에게 그림 상속

아델레는 클림트가 유일하게 두 점의 초상화를 그려준 여인이다. 첫 초상화를 그린 것은 그녀가 25세 때였다. 아델레는 44세에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자식이 없었다. 남편 블로흐 바우어는 나치의 등장으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수용소에 수감돼 고초를 겪다가 영국으로 탈출해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사망한다. 그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남편 알트만과 함께 용케 수용소를 탈출, 우여곡절 끝에 LA에 자리잡았다. 이들의 미국 정착은 성공적이었다. 남편은 항공기 제조회사 록히드 마틴에서 일했으며 마리아는 베벌리힐스에 캐시미어 가게를 열어 성업했다. 그들은 3남1녀의 가족과 더불어 다복했다.

아델레의 초상화를 비롯한 블로흐 바우어의 컬렉션들은 적법하게 오스트리아 정부의 소유가 돼 벨베데레 궁, 오스트리아 국립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아도 숙모가 죽기 전에 삼촌 블로흐 바우어에게 소장 미술품들을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기증해달라고 부탁했고 삼촌이 숙모의 유언에 따라 기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베르투스 체르닌이라는 한 집요한 오스트리아 기자가 블로흐 바우어가 남긴 유언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그 컬렉션들을 조카들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델레는 오스트리아 정부에 기증하기를 원했었으나 블로흐 바우어는 조카들에게 상속했던 것이다. 마리아가 이것을 안 것은 1999년, 82세 때였다.

마리아는 이후 오랜 법정투쟁 끝에 두 점의 숙모(아델라) 초상화를 비롯한 5점의 클림트 작품을 돌려받았다. 2006년이었다. 그리고 2011년에 95세로 사망했다.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소송을 질질 끌면서 자기가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고 분노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은 2006년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 창업주의 아들 로널드 로더가 1억3500만달러에 샀다. 당시 사상 최고가였다. 지금은 맨해튼에 있는 이 회사의 미술관(Neue Gallery)에 걸려 있다. 로더는 유대인이며 나치가 약탈한 유대인들의 미술품을 되찾는 데 힘쓰고 있다. 마리아가 오랜 소송으로 돈이 떨어져 고생할 때도 그가 도움을 줬다. 나머지 한 점의 다른 초상화가 바로 2006년에 오프라 윈프리가 산 것이다.

클림트를 유명하게 만든 것도, 그의 발목을 잡은 것도 에로티시즘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의 진실은 ‘본능적 삶’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여성을 통해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을 표현했다. 그가 상징주의자로 불리는 것은 ‘인간성의 원형’을 탐구하기 위해 이집트, 그리스, 로마, 비잔티움 혹은 동양의 신화나 전설, 표현양식에서 많은 모티브를 따와 상징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성의 원형이 성(性)에 있다고 봤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벽화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분 <사진 : 위키피디아>
구스타프 클림트의 벽화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분 <사진 : 위키피디아>

외설로 평가받은 ‘베토벤 프리즈’

클림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심미적 현상은 올바르다’는 니체의 심미주의, 미학지상주의를 믿었다. 그러나 퇴폐주의가 만연했던 ‘세기말 비엔나’에서도 수구 세력에는 클림트의 작품이 바람직한 ‘훌륭한 취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02년 14회 분리파 전시회는 베토벤에게 헌정됐으며 개막일에는 말러가 9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클림트가 벽에 그린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의 외설, 향락, 무절제에 충격받았다. 클림트는 ‘환희의 송가’를 그렸는데 관람객들은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상징이 아니라 나체와 섹스로 봤다.

전시는 실패로 끝났다. 1898년부터 1903년까지 ‘철학’ ‘의학’ ‘법학’이라는 주제로 주문받아 그려온 빈 대학 대강당 천장화도 추악(음란)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잇단 좌절로 그는 1905년 자기가 만든 분리파를 떠나 은둔에 들어간다. 그는 그를 넘어뜨린 에로티시즘에 더욱 천착했으며 ‘키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 등으로 황금시대의 절정에 이른다. 얼굴과 손의 자연주의와 여타 부분의 장식적 추상주의가 결합된 이 시기의 작품은 동그란 문양과 길쭉한 형태의 성적인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장식적인 부분은 비잔티움 미술의 영향이다.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나 응용미술학교를 나오고 ‘빈 공방’을 만들어 수공예의 진흥에 힘쓰고 ‘아르데코(art deco)’를 개척한 클림트에게 장식주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클림트는 여성들 속에서 살며, 성을 탐구했고, 여성들을 그렸으며, 여성들의 우상이 됐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샤넬, 이브 생로랑 등이 클림트의 작품 세계를 여성들의 의상에 차용했다. 1984년 클림트의 열광적 팬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골든글러브상 시상식에서 입었던 황금빛 드레스는 아델레가 초상화 속에서 입었던 것을 본뜬 것이다. 클림트의 ‘키스’는 모든 여성의 로망이다.


▒ 김순응
서던캘리포니아대(USC) 경영학 석사, 하나은행 자금본부 본부장, 서울옥션 대표, 케이옥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