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타워브리지. <사진 : 블룸버그>
영국 런던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타워브리지. <사진 : 블룸버그>

영국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영국인들은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뜻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중시하지만, 새로운 지식보다는 과거의 전통과 역사를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대로 존재하는 똑같은 모습의 거리와 쉽게 유행을 타지 않는 그들의 옷차림은 영국의 보수적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했다.

그런데 그런 영국이 ‘확’ 변한 계기가 있다. 블레어 정부가 새로운 영국을 만들겠다며 내세운 국가 브랜드, 즉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영국은 다시 세계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런던이 있다.


산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탈바꿈

‘쿨 브리타니아’는 1960년대 영국의 한 밴드가 부른 노래 제목이다. 1997년 출범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과거 대처 정부와는 획기적으로 다른, 그들만의 젊고 참신함을 내세우기 위해 이런 슬로건을 만들어 냈다.

블레어 정부는 쿨 브리타니아에 맞춰 쇠락해가는 영국의 기간산업을 제조업에서 문화산업으로 바꿨다. 음악과 패션, 디자인 산업을 중점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런던을 거점 도시로 띄웠다. 가장 먼저 ‘대박’을 친 산업은 뮤지컬과 출판이다.

100억원을 투자해 만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5조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창출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런던을 찾은 관광객의 40%가 뮤지컬 관람을 하기 위해서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그렇게 런던의 ‘웨스트엔드’는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웨스트엔드는 100여개의 극장이 밀집한 지역을 말한다. 런던 시내의 체어링 크로스로드를 기점으로 서쪽의 피카딜리 서커스와 동쪽의 코벤트 가든 주변까지가 웨스트엔드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뮤지컬계에서는 쌍벽을 이룬다. 공전의 히트를 친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사이공’ 등이 탄생한 곳이라 웨스트엔드에 대한 런던 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사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웨스트엔드는 브로드웨이에 밀렸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영국의 뮤지컬은 태생부터가 다르다. 미국 뮤지컬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쇼로 출발해 화려한 볼거리가 중심이다. 당연히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다. 이에 반해 영국의 뮤지컬은 연극이 기본이 된다. 연기에 충실하고 철학적이다.

영국인들에게 연극이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은 학교에서 발성과 연기를 배운다. 당연히 이들에게 연극은 일상이다. 연기에서도 말의 악센트와 톤, 호흡 등 언어 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해 미국 배우들보다 과장된 움직임이나 걸음도 적은 편이다.

뮤지컬 다음으로 파급 효과가 큰 장르는 출판이다. 출판과 연계된 문화 산업의 부가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가장 큰 문화 창조 산업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은 기본적으로 동네마다 있는 도서관에서 갓 출판된 책을 구입해 준다. 당연히 출판 산업 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영국은 출판 산업을 다양한 분야로 잘 활용했다. 영국인들은 ‘원소스멀티유즈’의 천재들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만 하더라도 5억권이라는 초유의 베스트셀러 신화를 기록했는데 영화로도 제작돼 74억달러(약 8조30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영국의 추리작가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는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아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도 제작됐다. 사진은 BBC가 최근 제작하고 있는 드라마 ‘셜록’ 포스터. <사진 : BBC>
영국의 추리작가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는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아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도 제작됐다. 사진은 BBC가 최근 제작하고 있는 드라마 ‘셜록’ 포스터. <사진 : BBC>

해리포터 순이익, 한국 반도체의 1.3배

코트라에 따르면 ‘해리포터’ 시리즈 관련 산업으로 벌어들인 순익은 같은 기간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 순익의 1.3배에 달한다. 한마디로 전 세계가 ‘해리포터 신드롬’에 빠졌던 셈이다.

선배 격인 ‘셜록 홈즈’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연재 소설로 시작된 홈즈 시리즈는 지금까지 200여편의 영화로 제작돼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의 배경이 런던이라는 점이다. 소설 속 주인공도 런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먼저 홈즈. 180㎝가 약간 넘는 키, 가늘지만 길고 힘센 팔다리, 길쭉한 얼굴과 각진 턱,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자신의 일에 철저하지만 세상에 냉소적이고 비사교적인 성격. 소설 속 홈즈의 모습은 런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이트칼라 남성이다. 서류 가방과 커피를 들고 분홍색 파이낸셜타임스를 옆구리에 낀 단정한 양복 차림의 영국인들은 런던 금융가인 더 시티 구역을 걷는다.

홈즈의 하숙집인 베이커가(街)도 실제로 런던에 있는 거리다. 지하철 4개 노선과 어지간한 버스들은 모두 지나다니는 런던의 대표 번화가다. 홈즈 시리즈가 재미있는 이유는 귀족들의 삶을 훔쳐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은밀하게 찾아와서 자신의 스캔들을 털어놓는다. 때론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해리포터’ 속에도 마찬가지로 런던이 나온다. 주인공이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는 킹스크로스역은 런던 서부에 있는 기차역인데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서 소설과 영화 속에 등장한 ‘9와 4분의 3 플랫폼’이 9번과 10번 플랫폼 사이에 실제로 생겼다.

출판은 문화 산업에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모든 콘텐츠의 출발은 출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연극·뮤지컬·영화도 스토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자국의 문화 산업을 경제 수치로 따져본 결과 광고와 방송·라디오는 각각 59억파운드(약 8조5700억원), 53억파운드(약 7조7000억원)였다. 그런데 출판 산업은 무려 1조16억파운드(약 1455조원)에 달했다. 런던의 새롭고 혁신적인 쿨 브리타니아는 영국의 스토리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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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 영국이 19세기 낡은 국가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내세운 국가 브랜드.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 총리가 ‘새로운 영국, 새로운 노동당’을 표방하며 내건 구호다. 블레어 총리는 아이디어와 감수성이 반짝이는 사회, 독창성과 개성이 어우러진 활기찬 사회, 이를 원동력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실제로 이후 영국에서는 문화와 지식 산업이 부흥했다. 스파이스 걸스와 같은 음악과 텔레토비, 해리포터 같은 문화 콘텐츠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