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사진 : 블룸버그>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사진 : 블룸버그>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1만3000원 | 310쪽

올해 노벨문학상은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1954년생인 이시구로는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고, 철학과 문예창작을 전공한 뒤 1980년대 초 영국 시민이 됐다.

스웨덴 한림원이 이시구로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지난해 미국 가수 밥 딜런에게 뜻밖의 상을 안겨줘 찬반 논란을 일으킨 탓에 올해는 전통적인 문학의 손을 들어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한림원은 문학성이 높으면서도 영어권에서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해 대중성도 갖춘 이시구로의 소설을 선택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읽기 힘들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잘 읽히는 작가를 선택해 대중적으로 노벨상의 영향력을 새삼스럽게 확대하려는 의도도 작용한 듯하다. 더구나 이시구로의 소설은 일본과 영국 문화의 특징을 융합한 측면이 있다. 한림원은 문화의 복합성과 혼종성을 잘 구현한 작가를 선택해 노벨문학상의 세계성을 드높이는 묘수를 뒀다고 볼 수도 있다.

이시구로는 30년 동안 창작 활동을 펼치면서 여덟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과작은 아니지만 다작도 아니다. 다행히 그의 전작이 우리말로 이미 번역돼 있다. 수상자 발표 이후 국내에서 그의 소설들은 두 주 만에 10만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이 가장 많이 읽힌다.


정교한 독서가 요구되는 책

‘남아 있는 나날’은 겉보기엔 평이하게 읽힌다. 스토리는 단순하고 분량도 그리 많지 않다. 1인칭 화자의 고백체로 서술됐기 때문에 독자의 감정 이입도 용이하다. 플롯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것이지만, 독자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독자가 작품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화자 ‘나’의 심층 심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을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교한 독서가 요구된다. ‘나’의 진술이 솔직하기도 하지만 자기 합리화와 망상에 의한 기억에 의존하기도 하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무조건 신뢰하기도 어렵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대로 이 소설의 화자 ‘나’는 1920년대부터 영국 귀족의 저택에서 집사로 일한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지만, ‘나’의 현재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인 갑부가 인수한 저택에서 고령에 집사로 ‘남아 있는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새 주인의 권유로 일주일 동안 휴가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나’의 여정은 사회 변화의 현장을 확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대영제국의 옛날을 회상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나’는 구시대의 유물이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갈 나날이 남아 있는 존재다. 이 소설의 마무리가 시간적으론 ‘저녁’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의도적이다. “하루의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며 과거와 현재의 뒤섞임이 빚어내는 인생의 황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이시구로의 문학을 유럽 소설의 칵테일에 비유했다. 사회 세태와 풍속도를 구수하게 묘사한 제인 오스틴, 실존의 수수께끼를 탐구한 프란츠 카프카, 잃어버린 시간을 회상해 자아를 재발견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뒤섞으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이 된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이 그런 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