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언어로 특유의 평이한 울림을 주는 김광규 시인. <사진 : 조선일보 DB>

안개의 나라
김광규 지음|문학과지성사
2만1000원|429쪽

김광규(77) 시인이 희수(喜壽)를 맞아 시선집 ‘안개의 나라’를 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낸 11권의 시집에서 스스로 골라낸 시 200여 편을 묶었다. 오늘의 한국 문학에서 김광규의 위상은 독특하다. 아마도 가장 쉬운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닐까.  그의 시 ‘나’를 읽어보자.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중략)/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중략)/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라는 독백이 시의 전반부를 장식한다. 이어서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라며 다시 앞의 진술을 요약해 반복한다. 숱한 ‘나’의 사회적 명칭을 나열하던 시인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라고 한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호칭을 털어버린 ‘나’는 무엇인가. 시인은 묻는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 그렇게 시가 끝난다.


일상 저변에 깔린 불안과 허무 끄집어내

4·19세대인 김광규는 서른 살이 넘어 등단했지만 문단에 매우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너무 쉬운 시를 써서 모두를 놀라게 한 것. 평론가들은 그의 시를 가리켜 ‘일상시(日常詩)’라 불렀다. 소시민의 일상을 소박한 언어로 그리면서 그 일상을 에워싼 시대 상황을 에둘러 비판하거나, 일상의 저변에 깔린 불안과 허무를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시 ‘작은 사내들’이 대표적이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중략)/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중략)/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중략)/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중략)/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그의 초기 시는 이렇게 풍자와 우화의 묘미를 쉽게 빚어내 허탈하면서도 웅숭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노년에 접어든 시 역시 그 특유의 평이한 울림을 잃지 않고 있다. 시 ‘새와 함께 보낸 하루’를 보자. 새가 모이를 쪼아 먹는 것을 지켜보면서 “주위를 살피는 시간은 꽤 길고/ 먹이를 삼키는 순간은 아주 짧다”라고 했다. 그러곤 ‘시 쓰기와 비슷하지 않은가’라며 시인의 자화상을 그려냈다. 마지막 행에선 “오늘도 시를 쓰지 못했구나”라고 한탄한다.

시 ‘녹색 두리기둥’에서도 버려진 전신주를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을 보며 자화상을 그렸다. 회색 시멘트 전신주가 지금껏 주로 도시에서 산 시인의 일상이라면, 그 위를 타고 오른 녹색의 담쟁이덩굴은 시인의 이상(理想)이라고 볼 수 있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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