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봄의 예보다. 냉이가 줄기를 뻗듯 봄도 머리채를 올려뻗을 거라는 친절한 알림이다. 우산을 챙겨 마을 버스 정류장에 섰다. 비의 토닥거림 덕분인지 거리는 평화롭고 젖은 땅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때도 비가 내렸다. 몇 년 전, 동창 친구들은 십시일반으로 주머니를 털었다. 그러곤 싱크홀에 빠져 있는 내 손을 잡아 끌어 비엔티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도착한 라오스는 종일 비를 뿌렸다. 가늘게 흩뿌리다가 굵게 촉을 세우다가 하늘 구멍을 좁혔다 넓히기만을 반복했다. 그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무작정 비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9번 마을버스를 타고 망원시장에 내린다. 시장 주변은 사람들과 승용차로 북새통이다. 길의 이름이 알려지고 인기를 얻으면서부터 후발 상인들은 핑크색 레터링 사인으로 말을 걸고, 그릇에 담기는 맛보다 렌즈에 담기는 맛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갈수록 속 보이는 동네의 변화에 금세 흥미가 떨어져 한강으로 향한다. 걷고 또 걷는다. 시장보다 한강에 더 가까워질 무렵, 식당 하나가 눈에 띈다. 라오스 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리어카와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등, 라오스어로 쓰인 주차 표지판. 주인이 세세하게 공을 들인 모양새에 눈이 뜨인다. 더군다나 태국도 베트남도 아닌 라오스 식당이라니.


라오스 식당 ‘라오삐약’. 사진 김하늘
라오스 식당 ‘라오삐약’. 사진 김하늘

서울에서 보기 드문 라오스 식당

‘라오삐약(Lao Piak)’ 경쾌해진 마음으로 가게 이름을 동요처럼 부르며 입구로 들어선다. 두 여자가 조리하다가 몸을 돌려 화사하게 환대하며 인사한다. 허기도 잠시 잊고 주변을 돌아본다. 열 평 남짓한 가게는 냉장고 두 대로 조리 공간과 식사 공간으로 나뉘며, 주방 천장에는 줄줄이 7개의 환풍기가 덕트를 대신하고 있다. 시간에 다듬어진 듯한 의·탁자의 둥근 모서리는 익숙함을, 모빌처럼 달린 가지각색의 조명은 화려함을 더한다.

간밤에 술을 마신 터라 속이 창 밖처럼 허하다. 까오삐약 한 그릇에 스프링롤 하나, 라오스 쌀로 빚은 잔술까지 주문을 마친다. 얼마 있지 않아 면과 국물이 모자라면 언제든지 리필이 가능하다는 배부른 한 마디와 함께, 요리와 술잔이 테이블 위로 오른다. 까오삐약은 닭고기나 닭뼈를 우린 육수에 국수를 익히고 닭고기와 양파, 쪽파, 튀긴 마늘을 얹어 먹는 것이 기본이다. 이 집은 닭고기를 호방하게 찢어 봉긋하게 얹었다. 그 푸짐함에 이끌려 단박에 국수 그릇을 들어 국물을 들이마신다. 그 늠름한 육수의 맛에 놀란다. 스프링롤은 갓 튀겨 먹기 좋게 반으로 잘라 나온다. 산도가 있는 소스에 톡 찍어 먹으면 끝맛이 가뿐하고 야무지게 다잡힌다. 잔을 들어 술 한 모금을 삼킨다. 정오도 채 되지 않았건만 어깨 끝이 노곤하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비운다. 틈을 타 사장으로 보이는 두 여자에게 대뜸 말을 걸어 본다. 도대체 어떻게 라오스 음식을 서울의 골목까지 들여서 이렇게 맛있게 낼 수 있는지 말이다.

“저는 방송사 PD, 이 친구는 아나운서였어요. 둘이 같이 라오스로 휴가를 갔는데, 정말 좋은 거예요. 이후 한 달에 세 번을 오가며 라오스 식당 이곳저곳에서 음식을 배웠어요. 쉽지만은 않았는데, 감사하게도 국수 한 그릇값을 받고 레시피를 알려주는 곳도 있었죠. 언어의 장벽은 구글 번역기로 해결했어요. 그렇게 6개월간 준비했고, 창업한 건 작년 4월이에요. 외식업 경험이 전혀 없고, 상권보다 고즈넉한 풍경을 선택해 이곳에 왔어요.”

두 여자는 서로 생김새는 다르지만 또랑또랑한 눈빛과 연신 볼에 머물러 있는 입꼬리가 닮았다. 이따금씩 말의 첫머리에 서로 눈을 마주치곤 하는데, 마치 배낭을 멘 여행자를 보는 것 같다. 호기롭게 지도를 펼치고, 발걸음을 맞추고, 눈에 보이는 것을 똑똑히 바라보고 탐험하는 삶의 여행자들. 커피 한잔으로 이 여유의 잔상을 더 늘이고 싶다. 다음 행선지를 맡기니 골목을 통째로 소개한다.

“여기가 희우정로 10번째 골목인데요, ‘코코부코(COCOBUKO)’라는 코코넛 음료 가게가 가장 먼저 보이실 거예요. 가로질러서 ‘훌라훌라(HULAHULA)’라는 하와이안 음식점이, 저희 양 옆으로 태국 장식품을 파는 잡화점과 ‘오브니(OVENY)’라는 프랑스 빵집이 있어요. 오브니가 이 골목의 최고 선배예요.”


하와이안 음식점 ‘훌라훌라’. 사진 김하늘
하와이안 음식점 ‘훌라훌라’. 사진 김하늘

풍성한 맛의 크루아상

또 보자는 인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진한 버터 냄새가 손짓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외벽에 ‘빵’이라고 떡 하니 써 있는 호방함에 반하고, 장식처럼 단정하게 놓인 과자와 빵의 포근함에 금세 포만감을 잊는다. 큰 창이 달린 마루에 앉아 갓 나온 크루아상과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부지런히 빵을 굽는 두 남자를 바라본다. 두 사람이 손발을 맞추는 게 옆집과 꽤 닮았다. 하지만 이쪽은 구별이 좀 뚜렷하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쪽이 쉴 새 없이 묻고 가르치고 체크한다. 그럼 다른 한쪽은 짧고 담박하게 답하며 민첩하게 움직인다. 마치 척척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보는 것 같다. 그의 이력을 물었다.

“저는 엔지니어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쓸 데 없는 것을 모아 볼트와 너트로 이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재미를 느꼈어요. 주위에선 뜬금없이 웬 빵이냐고 하는데, 글쎄요. 손에 쇳덩이 대신 밀가루를 들고 있는 것뿐,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이 동네 친구들도 다들 저처럼 좋아하는 것 하나 믿고 직업을 바꾼 셈이죠.”

반으로 썰어 살포시 포갠 크루아상을 한 입 물었다. 파르르 바스러지며 입안으로 들어오는 그 맛은 윤택하고 풍성하다. 부스러기가 입 밖으로 쏟아지는 것조차 아깝다. 한껏 열어 젖힌 마루 창문을 통해 누군가는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골목의 풍경을 바라보며 매일 빵을 구울 것이고, 또 누군가는 창 밑 마루에 앉아 그가 구운 빵을 먹으며 맛의 한 장면을 그릴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그들은 이 골목에 왔고, 그들이 만드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 또 다른 친구들이 이 골목을 찾을 것이다.

비가 그쳤다. 빗소리보다 친구들의 수다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때 그곳에서만 존재할 줄로만 알았던 그 풍경이 이곳에서 무지개처럼 떠오른다. 우리가 걷는 길의 이름은 희우정로, Happy Friendship Road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