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은 언제나 낯선 만남의 연속이다. 각자의 탐험에 알맞은 지도를 갖고 비행기에 오른다.
공항은 언제나 낯선 만남의 연속이다. 각자의 탐험에 알맞은 지도를 갖고 비행기에 오른다.

일 년에 서너 번은 한국을 들락거리고 해외여행을 두어 번 이상 더 하기에 로스앤젤레스(LA) 국제공항은 꽤 익숙한 공간이다. 덕분에 빠른 동선으로 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오늘은 탑승 수속을 마치고 곧바로 라운지로 들어가서 음식 코너로 직진했다. 접시에 밥과 야채, 크림소스로 요리한 닭요리를 담고 토마토 스프를 곁들였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두 차례 나왔지만, 내겐 이륙 시간까지 30분이 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라운지를 나와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앞서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볍지만 따뜻한 질감의 카디건에 아이보리색 면바지 너머로 움직일 때마다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운동으로 단련된 과하지 않은 탄탄함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민트색 스니커즈가 산뜻하게 예뻤다. 아주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 위에 질 좋은 검정 가죽 서류 가방이 달려 있었고 가죽 가방만큼 까만 머리칼이 풍성했다. 뒷모습만 봐도 상당히 세련된 분위기의 남자였고 나는 그의 앞모습도 궁금해졌다. 마침 슬쩍 보이는 옆모습으로 검은 뿔테 안경 아래 오뚝한 콧날, 높고 반듯한 이마, 곧고 단정한 턱선이 드러났다.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동양 남자였다. 일본인일까? 승강기 앞에 선 사람은 나와 그 그리고 내 옆에 선 안경 낀 느슨한 커트 머리의 중년 여성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내 쪽을 슬쩍 돌아봤다. 그의 등이 멈칫하는 걸 느꼈다. 곧이어 무심한 듯 우아하게 안경을 벗어 집어넣는 것이 보였다.


노골적 시선보다 장난스런 상상이 좋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한 그는 단정하고 차가운 느낌의 미남이었다. 긴 아몬드 형의 눈 위로는 부담스럽지 않은 굵기의 쌍꺼풀이 있고 콧날은 정면에서 바라봐도 아름다웠다. 입술은 다소 얇은 듯했지만 얼굴 전체와 균형 있게 자리 잡았고 잘 다물린 입매에서 매사에 꼼꼼하고 정확한 기질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눈빛에선 다소 차가워 보이지만 자부심이 적절히 깃든 공평함과 단정함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무례하지 않게 나를 몇 차례 스쳐갔다. 나 역시 그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시야에 그를 담아낼 뿐이었다. 노골적인 눈빛은 무례한 법이니까. 머릿속으로 장난스러운 상상이 오고갔다. 내게 만약 명함이 있다면(난 아직 명함이란 걸 만들어 본 일이 없다) 그에게 슬쩍 전해줄 수 있었을까. 별일 아니라는 듯, 어쩌다가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듯 가볍고 우아하게. 그리고 그를 떠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듯 걸어 나갈 수 있으리라면 좋을 것이다. 수줍지만 단호한 동작으로.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것은 일본 여권이고 일본 항공사의 로고가 찍힌 항공권이 함께 있다. 왼손에는 구김 없는 프레드 시걸 백화점 쇼핑백이 들려있다. 공항 라운지 아래층의 백화점 지점에서 급하게 선물 쇼핑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보딩 시간을 이미 이십 분가량 넘겼고 게이트까지 걸어야 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와의 동반 승강기 여행이 끝나고 문이 열리자 빠른 동작으로 그를 앞질러 걸어 나갔다. 나는 속이 살짝 비치는 스웨터에 허리와 골반에서 다리까지 이어지는 선이 도드라지는 밝은 회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탈 비행기는 왼편 창밖으로 보이는 흰 바탕에 붉은 로고를 그려 넣은 일본행 비행기다. 내가 탈 비행기는 그의 탑승 게이트를 조금 더 지나 오른편 창밖으로 보이는 한국행 비행기다. 우리는 그렇게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인파 속을 헤치고 지나갔다. 짧은 조우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살면서 또다시 마주칠 날이 있을까? 5분을 넘기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과 체격을 기억할 만한 정보를 수집했다. 일본 여행을 가서 부딪치게라도 된다면 알아볼 만큼. 가볍게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을까. 조만간 명함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음 같아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탑승수속까지 완료한 티켓이 있다.

각자의 인생에는 각자의 티켓이, 각자의 운명이. 상상만으로 즐거울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스럽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일상의 나날에 유쾌한 판타지가 구름처럼 동동 떠다닐 수 있을 테니까. 넓게 뚫린 창밖으로는 로스앤젤레스의 화창한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를 태운 비행기가 날아갈 여정을 하늘에 그려본다. 하늘의 영토를 가르는 지도란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그가 스친 길을 나 또한 지나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살짝 가슴이 뛰었다.

하늘의 영토를 가르는 지도란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하늘의 영토를 가르는 지도란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인생의 탐험에 알맞은 지도가 필요해

어릴 적부터 지도 보기를 좋아했던 내가 어른이 되어 가장 빠져든 지도는 실제 세계의 지도가 아니었다. 우연히 책을 읽다가 참고문헌 설명에서 발견한 ‘사랑의 지도’였다. 17세기 살롱 문화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인 마들렌느 드 스퀴데리(Madeleine de Scudery)의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아 유행했던 ‘사랑의 지도(Carte de Tendre)’는 당시 프랑스 살롱에서 유행했던 즐거운 놀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탕드르(Tendre)’란 이름의 제국을 그린 지도에는 강들로 분리된 영토가 있고 이제 막 친구가 된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에 이르는 길들이 안내되어 있다. 잘못 들어서면 ‘위험의 바다’나 ‘무관심의 호수’로 들어설 수도 있지만, 주어진 길을 잘 따라간다면 ‘존경의 영토’나 ‘감사의 땅’에 무사히 도착할 수도 있다. 친절과 지속적 관심, 연애편지, 존중과 배려 등의 덕목과 무례함, 가벼움, 불공평함, 무지 등의 피해야 할 길들이 지도로 표현되어 있다.

21세기를 달려가는 오늘이지만, 나는 이와 같은 사랑의 지도 놀이는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실행되면 다정할(‘tendre’에는 ‘다정한’의 의미도 있다) 인생의 유희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영토를 다스린다. 기꺼이 초대하여 내 세계 속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과 외면하고 싶은 사람을 두고 있다. 나 역시 타인의 새로운 영토를 세심히 살피고 배우고 존경과 감사, 사랑에 이르는 길로 안내받고 싶기도 하다. 탐험에 알맞은 지도가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안전하며 즐거운 여정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에 오른 뒤 언제나처럼 내가 지날 노선을 화면으로 확인했다. 하늘 위로 나아갈 길에도 알맞은 경로가 있다. 내가 만들 명함의 뒤편에는 내가 그린 ‘사랑의 지도’를 새겨 넣을 계획이다. 새로운 영토에의 초대권 속 존경과 사랑, 감사의 땅을 향한 길들은 다음과 같은 표지를 가지고 있을 게다. 아름다움과 매너, 관용과 단정함, 정치적 올바름, 존중과 배려 같은 것들 말이다. 내 땅의 시민이 되기 위하여 나 역시 단련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