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 신촌에 문을 연 무인양품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 사진 연합뉴스
지난 2월 서울 신촌에 문을 연 무인양품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 사진 연합뉴스

‘애플 짝퉁’으로 시작했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전자기기 제조 업체로 짧은 기간에 성공을 거둔 샤오미. 그 샤오미의 마케팅 책임자 리완창(黎萬强) 부회장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사람은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일본의 디자이너 하라 겐야(原硏哉)라고 고백했다.

무인양품(MUJI·無印良品, 일본어 발음 ‘무지루시 료힌’)은 면봉부터 침대, 호텔까지 7500여 종에 이르는 제품을 생산하는 일본 대표 브랜드다. 1980년 일본 유통 회사 ‘세이유(西友)’의 PB(Private Brand)로 시작해 1989년 독립했다. 무인양품이란 ‘브랜드 없는, 좋은 품질의 상품(no-brand quality goods)’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심심한 무채색 색상에 장식이나 로고 같은 일체의 꾸밈이나 허세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라는 디자이너들로부터 존경받는 디자이너다. 그는 2001년부터 무인양품의 디자인을 이끌어 일본의 미학을 담아낸 ‘국민 브랜드’로 무인양품을 성장시키며 큰 명성을 얻었다. 교토 사원의 다실처럼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하라의 ‘공(空·emptiness)의 철학’은 무엇이든 담아내는 ‘빈 그릇’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단기간에 급성장해 후유증에 빠져 있던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현재 무인양품은 영역을 확장해 ‘무지하우스’를 판매하고 ‘무지호텔’까지 만들어 영업 중이다.

서울디자인재단의 주최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하우스비전-서울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하라를 지난달 23일 DDP에서 만났다. 흰머리에 알이 작은 안경, 검은 색상의 옷까지 전신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2001년 하라 겐야가 제작한 무인양품의 포스터. 지평선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장소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서 촬영했다. 사진 무인양품
2001년 하라 겐야가 제작한 무인양품의 포스터. 지평선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장소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서 촬영했다. 사진 무인양품


무인양품에 당신이 제시했던 ‘공의 철학’은 여전한가.
“물론이다. 나는 무인양품 포스터 시리즈로 텅 빈 지평선을 보여줬다. 비어 있다는 것, 나아가 비워 둔다는 것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지금도 무인양품 일을 할 때 이 메시지를 마음에 새긴다. 그래야 과장된 디자인을 경계할 수 있다.”

당신의 디자인엔 기능주의와 수퍼 노멀이 드러나 있다. 제품을 예를 들어 설명해 달라.
“수퍼 노멀(Super Normal)은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일본 디자이너)와 재스퍼 모리슨(영국 디자이너)이 주장한 개념이다. ‘평범하지만 멋진’ ‘비범한 평범’을 말한다. 디자이너가 잘 고안된 기능을 찾아주고, 소비자가 그것을 누리면서 점점 삶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물리학을 몰라도 직립보행을 할 수 있지만, 그게 중력 덕분이라는 걸 알면 좀 더 현명해지는 식이다. 무인양품의 수건은 레이스도 없고 색상도 다양하지 않지만 면이 정말 좋다. 다른 요소를 제한하고 수건의 기능을 극대화하면 그 촉감을 깨닫고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샴푸도 외양이 단순하고 좋은 성분을 찾게 된다. 점점 소비 패턴이 바뀐다. 접시를 예로 들어보자. 이탈리아에 가면 파스타 접시가 다 두껍다. 왜? 접시를 데워 요리 온도를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다. 사물의 원리에 관한 깨달음이 쌓이면 세계가 달리 보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메시지는 어떻게 탄생했나.
“대화 중에 우연히 나왔다. 사람들은 ‘에르메스가 좋다, 프라다가 좋다’라고 명품 브랜드를 얘기하지만, 브랜드가 없어도 ‘질 좋고 디자인이 좋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이 한국인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점심 뭐 먹을까?’라고 물었을 때 ‘우동이면 됐지’ 할 때의 그 느낌. 그게 ‘무인양품이면 충분하지’라고 할 때와 비슷하다.”

이때 ‘충분하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약간의 포기’라고 볼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제품을 갖고 싶어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에서 선을 긋는 것이다. 또는 어떤 확신을 갖고 레이스가 달린 수건이 아니라 단순하고 질 좋은 무인양품의 수건이 좋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난 그런 능동적인 소비자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풍요의 세상에서 왜 이런 역설을 추구하나.
“쓸데없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내 철학이다. 사물이든 욕망이든 에센스(정수)를 찾아내 최단 거리에서 실현하는 게 내 디자인의 목표다.”

무인양품이 만든 오두막집 ‘무지 헛’.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안을 일본산 삼나무로 마감했다. 9㎡ 면적의 이 오두막은 설치비를 포함해 약 3000만원에 판매된다. 미닫이문을 열면 툇마루와 바닥을 하나로 사용할 수 있다. 사진 무인양품
무인양품이 만든 오두막집 ‘무지 헛’.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안을 일본산 삼나무로 마감했다. 9㎡ 면적의 이 오두막은 설치비를 포함해 약 3000만원에 판매된다. 미닫이문을 열면 툇마루와 바닥을 하나로 사용할 수 있다. 사진 무인양품

혹시 생활 혁명가가 되겠다는 사명이 있나.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디자인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한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으로 출발했지만 제품과 건축으로 영역을 넓혔다. 영역 없는 디자인이 진짜 디자인의 개념에 가깝다. 디자인은 사실상 커뮤니케이션의 출발이자 소중한 질문 역할을 한다.”

집까지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했다. 계기가 있었나.
“다나카 잇코(田中一光·일본 그래픽디자인계의 거장)가 무인양품의 초대 아트 디렉터로 제품을 만들 때 그 수는 40종 쯤이었다. 내가 참여한 후로 5000종 정도가 됐다. 요즘엔 7500종이다. 단순히 생활용품을 파는 게 아니라 생활 전반을 오퍼레이션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 지금 소비자는 단순히 기성 제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직접 찾고 만들고 싶어 한다. 집이 그 정점에 있다.”

일본에서 주택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일본 국민들은 전쟁 이후 고도성장기를 겪으며 다들 비슷한 집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점점 리폼(건물의 내장재와 외장재, 설비 등을 개량하는 것)과 리모델링(건축물의 노후화 억제 또는 기능 향상을 위해 대수선하거나 일부 증축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일본의 집은 코인디비주얼(Co-individual)의 형태를 지닌다. 지금 유행하는 ‘공유’와는 다른 개념이다. 가령 2인 가족이라도 흔히 생각하는 ‘부부’만 있는 게 아니다. 90세 노모와 70세 아들이 함께 생활하는 등 ‘연결된 개인’이 집에 같이 산다. 노인과 독신 가구가 늘면서 집을 통신과 이동, 의료 등 산업이 교차하는 구심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미래 사회의 주택은 어떤 형태일 것으로 예상하나.
“미래는 물류 서비스가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주택의 현관 옆에 또 하나의 문이 생길 수 있다. 안전이 확보된 상태로 밖에서 냉장고 문을 열어 식품과 약물 등을 바로 넣는 식이다. 물류 데이터를 확보하면 혼자 사는 거주인의 안전도 점검할 수 있다. 문을 하나 더 다는 것만으로 사회가 바뀐다. 전기 자동차 배터리를 이용해 태양광을 더 잘 활용하는 집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일본은 에너지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서 항상 에너지에 관심이 많다. 집 안에 작은 녹색 공장을 만들어 원격 조종하는 농가형 하우스도 구상 중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딸이 아버지의 배추밭을 관리해주는 식이다.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라는 형태는 유지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영역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상품은 무엇인가.
“역시나 무인양품의 집이다. 집에 관한 아이디어가 계속 샘솟는다. ‘무지하우스’라는 집을 상품으로도 판매한다. 형태는 나무집, 창문집 등 다양하다. 무지호텔도 중국 선전에 생겼다. 럭셔리 호텔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것만으로 충분한’ 호텔.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는 적당하고 담백한 일본 여관이 모델이다. 곧 베이징과 도쿄 긴자에도 생긴다.”

지난 1월 중국 선전에 문을 연 무지호텔 객실 내부. 불필요한 요소는 배제하고 내부를 모두 무인양품 제품으로 채웠다. 사진 무인양품
지난 1월 중국 선전에 문을 연 무지호텔 객실 내부. 불필요한 요소는 배제하고 내부를 모두 무인양품 제품으로 채웠다. 사진 무인양품

또 무엇을 좋아하나.
“무인양품의 노트다. 처음 무인양품 디자인을 시작할 때 노트의 소재나 색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 환경도 고려했다. 노트는 앞으로 무인양품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어젠다를 제시한 제품이 됐다. 한 가지 더, 무인양품의 카레는 정말 맛있다. 인도에서 느끼는 그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 꼭 한번 먹어보길 권한다. 종류도 40가지나 되는데 내용물에 따라 포장 디자인을 달리했다.”

무인양품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관리가 어렵지 않나.
“일본엔 편의점 산업이라는 더 큰 공룡이 있다. 내 바람은 무인양품이 서서히 성장하는 것이다. 규모가 커지면 재료 관리와 유통의 효율성에 묶여 재미가 없어진다. 가령 예전에는 찢어진 버섯을 팔았다. 자연적인 슬라이스였다. 그런데 무인양품이 커지면서 버섯을 일부러 찢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판매를 중단했다. 물이 흘러가듯 조금씩 커지는 게 소비자에게도 좋다.”

일본의 디자인 산업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어떤 면에선 정체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 지역이나 중국 등 새로운 산업이 부흥하는 곳에서 새로운 디자인 조류가 탄생하고 있다. 일본은 뒷짐을 진 채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자동차나 정보기술(IT) 산업을 선도하는 것도 아니고, 에너지나 공항 등 공공 디자인에서도 ‘쿨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 공공 공간을 개발하려고 많은 노력 중이다.”

한국 건축가 최욱은 일본의 사무라이 미학은 정교하고 장인적이지만, 한국의 선비 미학은 관념적이고 직관적이라고 했다. 동의하는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사무라이는 칼 대신 아름다움으로 세계와 대결하는 면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만든 미적 클라이맥스가 있다. 반면 한국의 선비가 만든 아름다움은 철학적이고 좀 더 열려 있다. 미완성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디자이너로서 어떤 소재가 흥미로운가.
“흰 종이. 더러워지기 쉽고 찢어지기 쉽다는 그 소재의 긴장감이 재미있다. 사람이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때, 한 번 손을 대면 되돌릴 수 없다는 물성이 좋다. 종이가 있었기에 인간은 수식을 적고 기록을 남겼다. 인쇄된 활자나 컴퓨터도 멋지지만, 내게는 종이 그 자체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

재일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나다움을 알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을 ‘부족함을 알고 자족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디자인 세상도 그와 비슷하다. 잘 우려낸 찻물처럼 개운하고, 잘 말린 이불처럼 바삭하다. 사물의 사물다움, 인간의 인간다움이 고요한 평원에서 만나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합의할 때의 그 어른다운 산뜻함이란!


▒ 하라 겐야(原硏哉)
무사시노대 미술대학 졸업, 무사시노대 미술대학 조형학부 기초디자인학과 교수, 주식회사 일본디자인센터 대표


Keyword

기능주의(機能主義·Functionalism) 기능을 건축이나 디자인의 핵심 또는 지배적 요소로 하는 것. 건축이나 공예가 용도 및 목적에 적합한 디자인을 가진다면 조형의 미는 스스로 갖추어진다는 사고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