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의 계절이자 계절의 꽃이다. 따뜻하고 산뜻한 기운에 새잎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 오른다. 톡하고 터지는 꽃망울은 분홍빛 황홀경을 자랑하며 봄의 완성을 떠벌린다. 도시락처럼 챙긴 플레이리스트를 귀에 걸고 걷고 또 걸으며 오붓하게 혼자만의 봄소풍을 즐긴다.

“내 꽃잎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내 피어난 꽃 예쁜 화원 아니지만 괜찮아/ 나를 보려 발걸음 멈춰주는 그대만 있다면/ 난 그걸로도 행복 얻으니.” 강아솔의 ‘들꽃’을 귀에 꽂고 경리단길을 걷는다. 구옥을 개조해 비록 세련되지 않지만, 유리벽을 통해 다양한 개성의 알맹이를 드러내는 가게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갖가지 풀꽃으로 메운 들판이라도 걷는 것 같다. 비탈진 들판을 오르다 자율방범대 쪽으로 샛길을 타다 보면 또 다른 들판이 펼쳐지는데 일명 장진우 거리, 회나무길이다.

4년 전, 이 길은 만개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제 걸음으로 걷지 못하고 휩쓸려 다녀야 했다. 논현에 백종원이 있다면, 이태원엔 장진우가 있었다. 골목에 그의 이름이 붙여질 만큼 신드롬을 일으켰다. 하지만 더 이상 장진우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휘영청 간판을 밝히지만 문을 닫은 곳과 닫을 곳이 즐비하다. 성업 중인 곳도 드물다. 모두 어디로 간 걸까.

플랫아이언의 대표 메뉴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 사진 김하늘
플랫아이언의 대표 메뉴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 사진 김하늘

이 공허한 물음에 침묵하는 듯한 조용한 가게가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내성적이다. 가게 외관 바닥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간판을 보고서야 이름을 겨우 알 정도이니까. ‘플랫아이언(Flat Iron)’. 다리미질을 끝내주게 잘하는 세탁소인가. 가지각색 물감을 흩뿌려 놓은 벽, 단출한 조리 공간, 스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나무 탁자가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부풀린다. 짙은 색의 재즈가 나지막이 흐르는 가운데 한 남자는 책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한 남자는 주방 한쪽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그 적막에 동참하고 싶어 가만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남자가 엽서처럼 쓴 메뉴판을 가져다 준다. 몇 가지의 샌드위치와 수프 그리고 커피를 비롯한 음료가 손글씨로 적혀 있다. 머시룸 수프와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주문받은 남자는 두둑한 덩치와는 달리 수줍음이 많아 보인다. 머리가 작고 잘 빠진 수저 한 세트와 말간 접시가 테이블 위에 차려진다. 곧이어 목이 긴 그릇에 수프가 담겨 나온다. 수프의 신선한 향은 뭉개지지 않고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고, 부드럽되 질펀하지 않은 질감은 입안을 포근하게 적신다.

수프 그릇을 다 비울 때쯤, 남자 주인은 샌드위치와 아이스 커피를 내려 놓으며 수프의 맛을 묻는다.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니, 그 모습을 본 주인은 건너편 자리에 앉는다. 제집에 초대한 친구의 표정을 살피듯 세심한 친절함이 배어 나온다. 그릴 자국이 선명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문다. 테트리스 블록을 빈틈없이 쌓아 올려 끝끝내 격파한 맛이랄까. 칭송하듯 그를 바라본다. 그러자 그는 말한다. “입 가장자리까지 꽉 차게 드시면 더 맛있어요.”

그는 회계사로 일하다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차리기 위해 퇴사했다. 1년 반 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샌드위치를 배웠고, 400만원이라는 비용을 샌드위치용 빵을 먹고 연구하는 데 할애하기도 했다. 인지도가 있는 거리에서 시작했지만 매출은 그만큼 따르지 않았다. 여러 명이 메뉴 하나를 시키곤 인증샷만 찍고 나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느 상인들처럼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음식을 팔아 남기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사람을 남기길 원했으니까. “영화 ‘뉴욕의 가을’에서 셰프 리차드 기어가 자기 레스토랑에서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반했어요. 음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맛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요.”

마쵸스헡에서 즐기는 맥주 한잔. 사진 김하늘
마쵸스헡에서 즐기는 맥주 한잔. 사진 김하늘


직접 만든 식기, 우직한 서비스

그는 섬세하다. 그는 이곳에서 쓰는 모든 식기를 만들었다. 샌드위치와 샐러드가 놓이고도 남는 여백까지 계산했다. 스푼은 입안에서 수프를 입에 묻히지 않고 작고, 부드럽게 입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두껍고 뭉툭한 것을 선택했다. 그는 느긋하다. 소고기는 하루 동안 마리네이드해서 세 시간 굽고, 수프는 세 시간 끓인다. 그동안 재료의 변화를 가만히 관찰하거나 사색한다. 그림도 그린다. 글도 쓴다. 그는 치밀하리 만큼 사려 깊고 우직하며, 이 면모가 그대로 음식과 서비스로 발현된다. 이 집의 단골은 300여 명에 달한다. 그가 만드는 음식을 먹고 가만히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그 숫자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특별해진다. 누구에게나 특별해진다.

샌드위치 빵의 그릴 자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료를 조립하는 순서와 이유는 무언지, 왜 ‘플랫아이언’이라 이름 지었는지, 등 끊임없이 묻고 또 답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다른 한 남자가 이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 골목 보틀숍(주류 판매점)이자 바비큐 식당 ‘마쵸스헡’ 사장이 놀러 온 것이다. 이 둘은 동갑내기 친구다. 가게 이름과 업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둘은 확연히 다르지만, 오래도록 함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교집합이다. 마초스헡과 마주하고 있는 카페 버클리 커피 소셜, 스페인 음식점 모멘토스 역시 마찬가지다.

맥주 한 잔을 할 요량으로 마초스헡으로 자리를 옮겼다. 1층부터 루프톱까지 통째로 바비큐 음식점으로 운영하다가 얼마 전 1층을 와인과 맥주를 파는 보틀숍으로 변경했다. 사람들의 발길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지만 임대료는 2년마다 꼬박꼬박 오르기 때문이다. 1층은 다양한 수입 맥주와 와인으로, 2층부터는 캠핑 테이블과 의자로 공간을 채웠다. 그에게 사정이 나아졌냐고 물었다. 그는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그저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했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킨다. 회나무로에 다시 찾아 올 봄날을 기다려본다. 그 수명은 꽃의 영광만큼 짧지 않으리라 기대해본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