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집 ‘블로썸’. 사진 김진영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집 ‘블로썸’. 사진 김진영

활짝 핀 벚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즌이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거리도 잠시 멈춰 서게 된다. 벚꽃 앞에서 잠시 멍해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기도 하고,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을 찍기도 한다. 1년 중 아주 잠시 잠깐 누릴 수 있는 꽃의 계절은 짧기 때문에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아쉬운지.

벚꽃 시즌이 되면 생각나는 사진집이 있다. 독일 현대 사진가 토마스 데만트의 ‘블로썸(Blossom)’이다. 영국 출판사 ‘맥(MACK)’에서 2015년에 출간한 이 책은 토마스 데만트가 2013년부터 작업했던 벚꽃 시리즈를 담고 있다. 나는 2014년 홍콩 아트바젤페어에서 이 시리즈 중 한 사진을 처음 보았다. 내가 본 사진은 가로 길이가 2 정도되는 큰 사진이었는데, 만개한 벚꽃 나무를 담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책을 통해 데만트의 벚꽃 사진들을 보게 됐다.

사진집 ‘블로썸’에는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거리, 그리고 빛을 이용해 담은 다채로운 벚꽃 풍경이 담겨 있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을 배경으로 한 벚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곧 동이 트고, 대낮이 되고, 해가 뉘엿뉘엿지고, 마침내 저녁 무렵의 벚꽃으로 끝이 난다. 첫장부터 차례대로 사진집의 순서를 따라가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으면, 벚꽃이 완연하게 핀 4월의 어느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 이 사진집은 프렌치 폴드(french fold) 제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책들에서 각 페이지는 모두 잘려서 서로 분리되는 데 반해, 프렌치 폴드 방식은 종이를 자르는 방식이 아니라 종이를 접는 방식에 기초해 있어서, 페이지가 서로 연결될 수 있고 책 안에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이다. 책 안에 숨어 있는 이 공간에도 벚꽃이 프린트돼 있는데 이렇게 숨어 있는 벚꽃 사진을 보려면 연결된 페이지를 둥글게 말아 위로 들어 올려 그 안을 들여다 봐야 한다. 이렇게 책을 위로 들어 올리는 순간, 벚꽃 길에서 올려다 본 풍경처럼, 머리 위에 벚꽃이 드리워지게 된다. 이 사진집은 2차원 평면인 종이에 사진을 인쇄하되, 책을 최대한 3차원으로 디자인하려고 한 점이 놀랍다. 잠시 활짝 피고 사라지는 벚꽃이 데만트의 사진에서는 이렇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박제돼 있다.


프렌치 폴드 제본 방식으로 만들어진 ‘블로썸’. 사진 김진영
프렌치 폴드 제본 방식으로 만들어진 ‘블로썸’. 사진 김진영

하나의 장면 위해 6개월간 모형 제작

토만스 데만트에 관한 별다른 배경 지식 없이 이 사진집을 본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벚꽃의 형식적 아름다움과 책의 만듦새에 감탄하며 이 사진집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이 벚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 것처럼, 그 역시 벚꽃의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라고 손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사실 조금 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그가 찍은 벚꽃은 실제 벚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벚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찍은 벚꽃은 사실 모두 그가 직접 종이로 만든 것이다.

토마스 데만트는 사진을 찍기 앞서 본래 조각을 공부하다 사진의 길에 들어선 작가다. 그는 그간 종이 모형을 이용한 다양한 사진 작업을 해 왔다. 그는 우선 현실의 한 풍경을 선택해 그것을 종이로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해 낸 후, 종이 모형을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미국 대통령 집무실을 작업한 ‘프레지던시(Presidency·2008)’,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중앙제어실을 작업한 ‘컨트롤 룸(Control Room·2011)’과 같이 공적인 공간부터 욕실을 재현한 ‘배스룸(Bathroom·1997),’ 택배 박스를 풀어 해친 일상적 장면을 나타낸 ‘파슬(Parcel·2011)’ 등 사적인 공간에 이르는 작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짧게는 40시간,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종이 모형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 모형 작업에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사물 중 하나가 바로 나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잎과 가지 등 복잡하고도 정교한 자연의 산물을 인공적으로 재현해내는 데에는 상당히 세밀한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집으로 ‘블로썸’ 시리즈를 접하기 이전에, 전시장에서 이 사진을 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토마스 데만트의 작업이라는 것을 모르고 보았기 때문에, 그저 벚꽃을 아름답게 잘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작업이 종이 모형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데만트의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제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벚꽃이 어딘가 이상했어!’

사실 그의 벚꽃 사진은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이라는 점을 모르고 보더라도, 종이로 만들어진 벚꽃을 찍었기 때문에 어딘지 생경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본 나는 그 정체 모를 이상한 느낌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것을 나의 선지식으로 덮어버렸다. 나의 선지식이란, 바로 사진은 허구가 아닌 실재의 재현이라는 점이다. 사진은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을 찍는 것이라는 믿음. 벚꽃 사진은 자고로 땅에 뿌리박고 있는, 생명을 지닌 벚꽃을 찍은 사진이리라. 사진에 대한 이 강력한 믿음은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을 본 나의 (어쩌면 더 참일지 모르는) 감각과 느낌을 압도해버렸던 것이다.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은 이와 같이 사진을 보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익숙한 관점을 전복시킨다. 그의 사진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 같다. 사진이 어떤 실재를 믿을 만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은 옳은가? 사진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실재를 조작하고 허구를 만드는 데에 더 능한 것은 아닌가? 여기에 더해 그는 종이 모형을 만들어 촬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들여 만든 종이 모형을 사진 촬영 후에 모두 파기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이 지점에서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모든 사진은 지나가버리고 없는 것,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사진을 보며 사진 속 대상이 존재했다고 말하지만, 사진은 그와 동시에 그때 그 대상이 사라지고 없음도 함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집을 오래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어 현실의 사물을 보면, 그가 만든 종이의 세계와 우리의 현실 세계가 연결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잠시 존재했다 사라지는 종이 모형의 세계, 잠시 활짝 피는 벚꽃, 그리고 나. 이 사진집에 실린 벤 러너의 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느 봄날 저녁, 지나가는 꿈처럼.”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