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공 던지고 치는 게 좋아서 친구들과 나무 막대기 놓고 고무공으로 맞추며 놀았다는 이승엽. 고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 KBO리그 통산 홈런·득점·2루타·1루타·타점·장타율 모두 최다 기록을 달성했다. /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이승엽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인터뷰 자리에 나타났다. 건강하고 다부진 체격은 예상했지만 수다스러울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나 몸값을 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선명한 프로 의식 때문인지, 질문이란 공을 던질 때마다 주저하거나 엉덩이를 뒤로 빼는 일이란 없었다.

얼마 전 그는 야구 인생 33년을 정리하는 ‘나. 36. 이승엽’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동시에 유소년을 위한 장학재단을 출범시켰다. 이승엽야구장학재단은 가정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마음껏 야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평생 승부를 위해 살던 ‘공 앞의 사나이’가 남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풀어진 몸에서 나오는 생기에 주변 사람도 광합성이 되는 것 같았다.

이승엽야구장학재단의 ‘이승엽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2018 KBO 퓨처스리그(프로야구 2군 리그)’ 개막식이 열린 4월 3일, 서울 서초동 재단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2008년 8월 22일 베이징 우커숭 경기장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 야구 한국 대 일본의 준결승에서 8회 말 1사 1루서 이승엽이 우중월 역전 2점 홈런을 치고 환호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국내에서 활동한 기간엔 한 번도 2군에서 뛴 적이 없지 않나.
“일본에 진출하기 전 한국에서 뛴 9년간 1군 엔트리에서 빠진 적이 없다. 그래서 사실 2군 선수들의 고통을 몰랐다. 야구는 그냥 하면 잘되는 거였다. 일본에 가서 2군 생활을 길게 해보고야 알았다. ‘내가 그 생활을 겪지 못했으면 내 야구의 깊이가 없었겠구나, 한국에서 야구를 오래 하지 못했겠구나’ 하고.”

이승엽은 1976년 대구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해 1995년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 프로 무대를 밟았다. 데뷔 3년 만에 정규 시즌 MVP에 오른 뒤 1999·2001·2002·2003년 통산 5차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홈런·득점·2루타·1루타·타점·장타율 모두 최다 기록을 달성했다.

모두가 힘들던 IMF 시절, 이승엽의 홈런은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부러울 게 없었던 이승엽은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잔류와 메이저리그 진출 대신 일본을 선택해 대한해협을 건넜다. 2005년과 2006년 시즌은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했지만, 짧은 영광 후 어찌 된 일인지 이 ‘대한민국의 4번 타자’는 일본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긴 기간 부상과 부진을 겪었고 향수병이 이어졌다. 일본의 지바 롯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릭스 버팔로스 등 3개 구단에서 활약했던 8년간, 1군과 2군의 체류 비율은 60 대 40이었다.

야구는 데이터 스포츠라 매번 승부에 촉각이 곤두설 것 같다.
“무슨 수를 쓰든 이겨야 하는 세계다. 프로에선 1등이 두 명일 수 없고, 친한 친구와도 실력으로 공존할 수 없다. 어깨 토닥이며 서로 격려해도 마음속엔 ‘저 친구가 못해야, 이 친구가 다쳐야 기회가 온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갈등과 번민이 다져지면서 강한 남자가 된다. 원래는 여린 남자였는데, 일본 생활하면서 아기 사자가 숫사자가 됐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전혀. 야구를 잘할 땐 더 큰 목표가 있어서 하고 싶었다. 못할 땐 이렇게 끝낼 수 없어서 하고 싶었고. ‘먹튀’다, ‘실패자’다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일본에서 8년간 진짜 많은 걸 배웠다.”

그 와중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그때도 예선전에서는 부진했다. 준결승·결승전에서 홈런 하나로 모든 걸 만회했다. 홈런 못 쳤으면 죽을 때까지 실패자 낙인이 찍혔을지도 모른다.”

당시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김경문 감독의 리더십이 탁월했다.
“당시 난 연이어 삼진을 당하고 병살타를 쳐서 괴로운 상황이었다. 관중석에선 한국분이 ‘이승엽 빼라!’고 고함을 쳤다. (일본과의 준결승전) 점수 2 대 2 상황에서 타석에 나가기 전 감독님을 쳐다봤다. ‘제발 날 좀 빼주세요’라고 신호를 보내면서.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원 스트라이크, 파울을 하나 친 상황에서 느낌이 반전됐다. 보통 그 상황이면 자신감이 떨어져서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데, 스윙 감각이 살아났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2점 역전 홈런이 터진 거다. 감독님께 나중에, 왜 그때 부진한 나를 안 빼주셨냐고 했더니 ‘4번 타자를 바꾸면 거기서 지는 거다’ 그러시더라. 결정적인 순간에 큰 몫을 해내리라 믿었다고.”

‘인생 한 방’이라는 말이 연상된다.
“‘왜 내가 이런 불행에 처했나’ 자책하면 미궁에만 빠진다. 단순하게 ‘공이 오면 공을 친다’, 그것에만 집중하면 훨씬 수월하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준비는 힘들게, 승부는 편하게’다.”

지독한 연습 벌레로 알고 있다. 경기 후에도 새벽까지 스윙 200개를 마치고 들어갔다던데.
“감각·스피드·궤도·자세…. 배트를 들고 타석에 들어섰을 때부터 공을 치고 끝날 때까지 가장 좋은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다. 맹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집중력을 갖고서 한다.”

이승엽은 운동 선수로서의 인격을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했다. 어떤 날은 홈런을 치고도 고개를 숙이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너무 젊은 투수의 공을 쳤을 때가 그랬다. 잘하는 선배보다 못하는 선배에게 깍듯이 하라는 건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담배와 술을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혹여 재능에 도취될까, ‘건방지지 마라’고 혹독하게 정신을 단속했다.

(좌)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이승엽.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엔 잘했던 해도 있었지만 부진했던 기간이 길었다. / 김영사 (우) 이승엽은 40의 나이에 ‘2015 타이어뱅크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42세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퇴했다. / 김영사

부친의 카리스마가 어느 정도였나.
“1997년에 첫 MVP에 홈런왕이 돼서 포상으로 차를 두 대 받은 적이 있다. 한 대는 내가 타겠다고 말씀드렸다가 된통 혼이 났다. 딱 한마디 하셨다. ‘건방지게!’ 그 한마디 말의 위력이 정말 컸다. 1999년에 두 번째 MVP가 되고 나서야 내가 차를 갖는 걸 허락하셨다.”

반면 이승엽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만 베풀었다. 늘 안쓰러운 얼굴로 맛난 밥만 입에 넣어주셨던 ‘엄마’는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

은퇴식 때 울었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나.
“엄마는 진통제만 먹고 제때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나도 중2 때부터 고3 때까지 부상으로 팔이 굽어서 하루도 안 빠지고 진통제를 먹었다. 어머니가 그걸 고쳐보시겠다고 새벽마다 잠든 내 곁에서 전기찜질을 해주셨다. 지금도 팔이 완전히 펴지지 않는다. 결국 투수에서 타자로 바꿨지만, 모든 과정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내겐 큰 위안이었다.”

스승에게도 많은 빚을 졌다고.
“백인천 감독님은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어떤 선수가 될래? 홈런 타자? 아니면 안타를 많이 치는 타자?’라고 물으셔서 ‘홈런 타자’라고 했더니, 스윙 각도와 폼을 바꾸라고 했다. 배트 위치를 높이고 더 짧고 강한 스윙으로 홈런왕이 됐다. 현재 KIA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있는 박흥식 코치(1996~2006년 삼성 라이온즈 타격코치)님은 형처럼 따뜻한 분이다. 내가 샛길로 빠지면 장문의 편지를 직접 써서 주셨다. ‘너의 그런 모습은 참모습이 아니다’라고.”

최근엔 투지와 인내를 의미하는 ‘그릿(Grit)’이라는 성공 키워드가 주목받고 있다. 운동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항상 힘든 걸 먼저 하는 성격이다. 100개 스윙을 해야 하면 그날 130개를 한다. 그러면 다음 날 70개만 하는 게 아니라 150개를 할 수 있다. 그런 날들이 쌓여 하루에 300개 스윙을 하는 나를 발견하는 식이다. 그런데 아들에게도 숙제를 먼저 하라고 했더니 힘들어하더라. 하하하.”

꾸준한 노력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인간인데 나태해질 때가 왜 없겠나. 그런 나를 질책해주시는 분들이 곁에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은 일본에서 ‘열심히 안 하면 배트 놔야지’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끝이 쭈뼛 서서 다시 공과 배트를 정성껏 닦는다. ‘승엽아! 오늘도 잘해보자’라고 중얼거리면서.”

프로선수로 23년간 뛰어 보니 야구가 어려운가, 쉬운가.
“야구만큼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스포츠가 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타석에 들어서면 쉽다. 투수가 던지는 공만 보고 공을 치면 된다. 그런데 투수와 머리 싸움을 하고 볼 카운트를 신경 쓰고, 스코어와 주자를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늪에 빠진다.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직구가 오면 이렇게, 변화구가 오면 이렇게’만 생각하면 된다. 같은 맥락으로 후배들에게도 말한다. 아마추어는 과정만 생각하고 프로는 결과만 생각하라고. 초·중·고 시절에 이기는 방법만 배우고 기본기를 못 배우면 정작 프로에 와서 오래 못 가고 망가진다. 그런데 결과만 생각하다 꿈을 못 이루고 하차하는 선수들이 많다.”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승부가 있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LG 트윈스와 9회 말 동점 상황에서 3점 홈런을 쳐서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첫 우승을 했다. 2003년에 시즌 56호 홈런을 쳐서 아시아 신기록을 냈을 때도 기억난다.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전에서 역전 홈런을 날렸을 때다.”

가장 뼈아픈 실패의 기억은.
“2008년 재팬시리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총 7경기에 나가서 겨우 안타 2개를 쳤다. 패인이 나라고 생각해서 정말 괴로웠다.”

타석에 서서 극심한 압박감이 몰려올 땐 어떻게 대처했나.
“압박감이 심할 땐 잘했을 때의 상황과 못했을 때의 상황을 그려본다. ‘9회 말 2아웃에 2 대 1로 지고 있을 때 내가 저 공을 치면 스타가 되고, 아니면 역적이 된다’는 그런 것.”

책에서 ‘나의 운을 젊은 선수들에게 물려줘야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부상 때문에 2군에 가서 많은 걸 봤다.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도 기회가 없어서 자포자기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다. 나는 못 해본 거 없이 다 해봤다. 지난해 은퇴 시즌에도 몇몇 경기는 빠지고 후배들에게 기회를 줬다.”

라이벌은 누구였나.
“나 자신이었다. 오로지 나의 나태와 자만과 싸웠다.”

홈런왕 이승엽, 국민타자 이승엽이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노력은 나이를 이길 수 있다. 오늘 안 되더라도 내일이 있으니 평정심을 갖고 목표를 향해 가면 좋겠다. 잘되고 안 되고는 모든 게 끝났을 때에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