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넥타이 부대나 쇳밥과 잉크밥을 먹는 인부들이 넘치던 이곳에 볼 빨간 사춘기의 젊은이들이 얼마 전부터 유입되기 시작했다. 불 꺼진 골목 안, 젊은이들은 걸음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댄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스마트폰 지도를 밝히며 주변을 수색한다. 벙거지에 펑퍼짐한 청바지와 외투, 높은 굽의 운동화. 그때 그 시절을 계승하는 듯한 차림의 그들은 이 골목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그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골목을 더 파고들었다. 보물찾기를 하는 탐험대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모퉁이마다 스마트폰을 들고 지도를 보는 이들이 눈에 띈다. 또 뒤를 밟는다. 식당, 바, 카페, 레코드숍 등 전에는 보이지 않던 곳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간판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나긋이 불을 밝혀 사람들을 불러 모을 뿐이다. 골목마다 쌓인 시간의 냄새를 맡으며 정신 없이 보물찾기를 하니 허기가 진다. 어두침침한 골목을 빠져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곳으로 향했다.

‘락희옥(樂喜屋)’, 즐겁고 기쁜 집. 그 이름 또한 밝다. 최근 을지로 지하 상가에서 지상으로 확장 이전했다. 마포에 본점을 두고 있지만 음식 맛은 같다. 보쌈 맛집으로 자리 잡은 이 집은, 껍데기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오겹살을 물 없이 익혀 두껍게 썰어낸다. 두꺼운 비계 끝은 풍성하고 탱탱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눈과 코를 접시에 박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중후하게 묵은 배추김치에 수육을 얹어 배추잎으로 야무지게 여민다. 입에 넣으니 아삭하다가 쫀득하다. 우두둑거리는 무김치, 개운한 백김치, 짭조름한 새우젓을 순회할 때마다 술잔에 술이 채워진다.

목구멍을 적시는 것은 술뿐만이 아니다. 김치말이 국수가 있다. 국수 그릇을 떠받들어 국물을 넘긴다. 날마다 맛이 깊어지는 김치처럼 삼키면 삼킬수록 응축된 양지머리 육수의 은은한 감칠맛이 목젖까지 배어든다. 소면 타래를 살랑살랑 풀어헤치니 국수의 살결이 느껴진다. 입안으로 호로록 잡아 당기면 치아를 스칠 새도 없이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이곳엔 ‘스테디셀러’ 만재도 거북손은 물론 방어, 석화, 보라성게알, 벚굴 등 탐식가의 까다로운 입맛까지 챙길 수 있는 계절 메뉴가 있다. 이렇게 락희옥의 음식은 감각의 성능과 주당들의 주력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콜키지 프리’. 외부 주류가 무료로 반입 가능하기 때문에 와인 애호가들의 모임 장소로도 손꼽힌다.

락희옥은 이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중년 남자의 크고 굵은 웃음 소리 사이로 동치미처럼 시원한 여자들의 수다가 떠다닌다. 젊은 남녀 커플과 노부부,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각각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껏 멋을 낸 어린 남자는 편의점 와인을 테이블에 올리며 상대 여자에게 와인 마시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 옆 테이블은 갖가지 안주에 소주병을 늘어 놓고 떠들며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다. 마포 본점에선 앳된 커플도, 소주병도 본 적 없다. 생경한 광경이다. 와인이나 사케가 아니라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와 마시다니. 개방적이지만 인텔리전트한 마포점과는 달리, 을지로점은 보다 푸근하며 얼터너티브(주류의 문화와 관습을 거부하는 태도)하다. 세대와 주종을 막론하고 모두 조화롭게 빈 도화지 같은 이곳을 채운다. 맛있는 음식과 술로 한껏 들떠 웃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이 바로 물감이다. 그 그림은 ‘락희옥’이라는 제목으로 완성된다.


락희옥의 국내산 오겹살 보쌈. / 락희옥

와인 바 ‘십분의 일’의 대문. / 김하늘

공생의 철학이 있는 와인 바, 십분의 일

을지로에서 1차만 하고 끝낸다는 건 이 유서 깊은 동네에 대한 실례다. 늘 이 골목을 지키던 곳, 을지오뎅으로 향한다. 사시사철 알을 밴 냉동 도루묵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어획량 감소의 주범을 자처한 곳. 들어간 기억은 있는데 나온 기억은 없는 곳. 1차로 들어 앉으려니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야 한다.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어두운 골목, 미로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희미하다. 그 주변에 사람들이 서있다. 심지어 줄을 섰다. 그들도 나도 동참한다. 가게문엔 헌 색종이를 재조합해 만든 듯한 글씨가 붙어있다. ‘커피·와인·치즈·맥주, 각종 안주, 소주 없음’, 야박하면서도 호사스럽다.

입구를 통과해 가파른 계단을 올라 현관문 앞에 섰다. 문에 붙은 쪽지엔 이렇게 쓰여있다. ‘십분의 일’.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서까래가 이 건물의 연식을 말한다. 천장과 공간의 모서리엔 오렌지색 램프가 불을 밝힌다. 냉기가 스민 맨 벽을 등지고 멀건 형광등 아래에서 빨간 소주를 퍼붓던 이 동네에, 이런 아늑한 공간은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종이 메뉴판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십분의 일은 10명의 남자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입니다. 십분의 일을 위해 우리 10명은 각자 월급의 10%를 공유합니다. 십분의 일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공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십분의 일은 1/10만 드리지 않습니다’. 소위 뜬다는 골목에서는 볼 수 없는 ‘공생’의 철학이 있다.

메뉴는 전문적이지 않다. 대문짝에 쓰여있는 주종에 어울릴 법한 가벼운 안주 정도다. 커피 한 잔 값도 되지 않는 하우스 와인도 구비돼 있다. 힙스터(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좇는 이들) 친구들은 도발적 표정과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주위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마치 비밀 살롱에 초대된 손님이라도 된 양 주변을 살핀다. 이 긴 역사의 공간에 힙스터들의 젊음이 어디에선가 은밀하게 이어져 진동하고 있는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수십 년 된 노포(老鋪)들과 샛별 같은 ‘힙플레이스’가 공존한다. ‘OO단길’이라 이름 붙여지는, 뜨는 동네는 새것이 옛것을 단숨에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만 이 골목은 다르다. 충돌하지 않는다. 함께 존재한다. 새로운 세대는 돋보이려 들지 않고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시간은 흐른다. 어떤 아름다운 것들이 언젠가는 낡거나 사라질지라도, 세월의 얼룩이 아닌 무늬가 되리라. 을지로는 재생되고 있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