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배제한 여성과의 만남이 가치없는 일이라고 평가하는 건 편견이다.

누군가를 친구로 두고 있더라도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긴 힘들다. 좋아하는 부분이 힘이 세면 거슬리는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진다. 하지만 그에 대해 변화 가능성을 점치고 시도할 수 없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보다 일곱 살가량 많고 여러모로 존경하는 친구인 A는 여성을 대하는 데 있어 올바름을 실천하며 사는 이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보면 종종 느껴지는 거리감이 있다. 그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 예의 바른 선비 같은 사람이라 별 문제없이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그와 얼마 전 대화를 나누다가 평소에도 인식하던 한계를 명확히 느낀 일이 있었다. 경보등이 빨갛게 울리는데, 그걸 지적해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걸 대화 도중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불편함을 경청하는 그이기에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그도 나도 끈기 있는 사람이고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신뢰를 바탕에 둔 친구니까.


사람의 매력을 누리는 방식은 다양

문제가 된 상황은 이랬다. 우리는 공통 지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을 많이 두고 있는 어느 남성이 화제에 올랐다. A는 그를 실속 없다고 했다.

“실속이라뇨?” 나의 반문에 그는 설명했다. 주변의 여성들과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따로 만나는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 놀랐다. 아름다운 여성을 연애 대상이 아닌 채로 만나는 것이 ‘실속 없다’고 인지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여성이 연애 대상으로서 소비될 때 실속 있는 것인가? 아니, 여성을 만나는 걸 두고 실속을 따지는가? 인간을 만날 때 실속을 챙기는지에 대한 질문은 물론이고, 그렇다손 치더라도 여성의 실속이 연애 가능성으로 수렴된다는 데 불쾌감을 느꼈다.

사람의 매력을 누리는 방식은 다양하고, 그 다양한 방식 중 연애가 있을 뿐이다. 나아가 연애를 ‘남녀의 성적 결합을 전제로 둔 유희’라고 협소하게 정의한다면 더더욱 불쾌하기 짝이 없다(연애는 남녀 간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성적 결합만을 전제한 행위 또한 아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문제가 지극히 여성 차별적이고 이성애자 중심적인 사고관에서 나온 관점인지 막막해졌다.

여성을 만나고 그들과 사회적 교류를 하는 것이 연애를 배제하면 별 가치 없는 일로 평가된다는 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한계를 정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인 편견이다. 나는 그에게 당부했다. 며칠간이라도 이를 화두에 두고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주변의 그와 같은 반응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과 당신의 편견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며칠 뒤 나는 화제에 오른 인물처럼 많은 여자친구를 주변에 두고 있는 친구 B를 만났다. 내 주변에는 여자를 그들 고유의 매력으로 좋아해주는 남자가 꽤 있고, 나는 그들을 친구로 두기를 좋아한다. 통상적 의미의 연애가 아닌 성적 결합 없이 유지되는 관계가 대부분이지만, 그들은 이를 두고 실속 없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성인 친구를 만날 때 실속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남자도 남자친구를 만날 때처럼 여자친구를 만날 때도 특정한 미덕과 매력에 의해 선택하고 집중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들과 오랜 친구로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건, 그녀들을 ‘여성’으로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앞에 있으면 내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느낄 수 있어 즐겁다. 나의 가치가 여성으로만 한정되지 않되, 여성적 매력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하고 자유롭다. 나는 그들 앞에서 여성인 동시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40대 중년이고 1990년대에 대학 생활을 보낸 X-세대이고, 한때 시네마테크를 들락거리며 영화에 열광했고, 전공까지 바꾼 오래전 프랑스 유학생이기도 하다. 나의 다양한 삶의 결이 그들 앞에서 숨을 쉬고, 편견으로 내려지는 한계를 답답하게 집어삼키지 않아도 되게 한다. 카페에 마주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시던 B는 나의 며칠 전 일화를 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네 친구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지만, 연애 감정 없이 우정을 누리긴 힘들다고 생각해. 우정도 어쩌면 연애의 일종이 아닐까 싶거든. 연애를 반드시 이성애자가 만나서 성적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잖아.”


동성과의 우정도 연애의 일종

어찌 보면, 이성과의 우정뿐 아니라, 동성과의 우정 또한 연애의 일종인지 모른다. 포괄적인 설렘을 느끼고 모종의 매력이 오간다. 직접적인 성적 매력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네가 보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그건 그만큼의 매력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관계를 성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사고하게 되면 더 큰 폭과 다채로움이 펼쳐진다. B의 말은 옳았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매력 넘치는 존재라는 것 역시 이를 증명한다. 그들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적당한 긴장감은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만남이 있고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무르익고 사랑의 감정에 충만해지며, 서로를 존재로 인정하고 누리는 과정이 이어지고, 또 그 안에서 우리는 변화한다. 이것이 연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그중에서 성적 매력이 직접적으로 오가는 상대도 있다. 혼란스러운 순간도 있다. 성적 매력이 결정적이지 않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사람이면 연애보다는 우정을 택한다. 그들 또한 속도를 가늠하고 주의 깊게 나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거침없이 빠져들고 싶은 상대라면, 이것이 상호적인 감정이라면, 빠르고 급한 연애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우정의 완행열차 대신 열애의 급행열차를 타는 기분은 아슬아슬하다. 한동안 내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절박한 순간 뛰어내리다 다칠 수 있음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아찔한 현기증과 아득한 황홀함이 함께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셈이다.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다. 누군가와의 연애는 평생에 걸쳐 이뤄지기도 한다. 연애 같은 우정이 삶을 지탱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날들이다. 만약 관계에 실속이 있다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부하고 흥미롭게 만들어주는가에 있지 않을까.

한정적 의미의 연애는 그중 매우 짜릿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모조리 수렴되는 가치는 아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인간이 되는 길은 다채로운 인간 매력을 여러 경로로 발견하고 누릴 줄 아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그런 사람일수록 일반적 의미의 연애도 잘한다.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깊고 풍부하게 인정해주는 상대에게 빠져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