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한옥마을 골목 풍경. / 조선일보 DB

작은 한옥들이 모여 있는 북촌과 익선동 일대 한옥집단지구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옥에 대한 평가는 정말 인색했다. 북촌마저도 건축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여겨져 재개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실제로 1980~90년대엔 북촌의 한옥을 철거하고 새로운 단지로 개발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익선동 역시 고층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하는 마스터 플랜이 2010년대 초반까지도 회자됐다.

한옥을 저평가하는 분위기는 과거부터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건축가로, 철거된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은 북촌이 귀족 계급 소유의 대형 한옥이 없어지고 소규모 한옥 집단지구로 바뀐 것에 대해 주거환경이 악화됐다고 비난했다.

이런 주장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커다란 정원과 큰 저택이 있는 19세기까지의 대형 한옥을 부순 자리에 아주 작은 한옥들을 압축적으로 건설한 것은 사실이다. 이 영향으로 같은 면적의 대지 위에 더 많은 인구가 살게 돼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당연히 과거보다 주거환경이 열악해졌다. 그러나 주거환경 측면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소규모 한옥을 저평가해선 안 된다. 당시 조선인들이 마주한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 서울은 명확하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뉜 도시였다. 일본인의 ‘게이조(京城·경성의 일본식 발음)’와 조선인의 ‘경성’으로. 같은 도시 안에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사실상 분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명동 일대에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 지역을 꾸준히 확장해 나갔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경성 남부 지역에 살던 중국인들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남대문로 일대로 거주지를 확장했다. 러일전쟁과 한일병합을 통해 경성 남부 지역을 완전히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10년 이후 일제 강점이 지속되면서 기회를 찾아 이주하는 일본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일본인이 거주할 주택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조선인의 주택부족 문제와 비교하면 부족한 주택 수 자체는 적었으나, 인구 대비로 따지면 심각했다. 1929년 중외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인 거주 가구 2만1034호 중 주택이 없는 가옥이 약 5200호였다. 경성 거주 일본인 네 명 중 한 명이 살 집이 없는 셈이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일본인 주택 부족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항이었다.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모두 주택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총독부와 경성부가 해결하려는 주택문제는 일본인에 집중됐다.

특정 지역에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는 경우 주거환경을 유지하면서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계획 정책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변의 농촌 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늘어나는 인구를 이주시키는 것이다. 서울이 과밀화되자 인근 경기도 분당과 일산에 신도시를 건설한 게 이런 케이스다. 다른 하나는 영국 등 여러 식민지배국가가 실시했던 것인데, 기존 피식민 계층이 살고 있는 지역에 식민 계층 거주지역을 건설하는 것이다.

일제는 2가지 정책을 모두 사용했다. 경성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신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영등포와 흑석동·왕십리 일대에 대단위 문화주택단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전략은 조선인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남촌(명동·충무로 일대)을 넘어 종로 이북의 북촌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일제의 북촌 진출은 앵커시설 건설과 도시미화라는 2개의 전략에 기반했다. 앵커시설은 사람들을 모으는 효과가 있는 건축물이다. 일제는 남촌에서 북촌으로 통치기구를 옮겼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총독부의 경복궁 내 이전이었다. 이는 많은 공무원들이 현재의 서촌(청운효자동·사직동 일대) 인근에서 주거지를 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다른 전략은 도시 미관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도시미화운동을 벌여 기존 거주민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익선동 도시환경정비계획 조감도. 이 계획은 2010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한옥 보존 등을 이유로 부결했다. / 종로구의회

북촌에 적산가옥 지어질 뻔

많은 조선인들은 북진(北進·북촌 진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심각하게 경계했다. 조선일보는 1925년 6월 18일 자 ‘종로도로 개수와 일본인의 북진-집을 헐고 이층 못 짓는 조선인, 할 수 없이 일본인에게 판다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일제가 종로 일대 도로를 넓히면서 수십채의 조선인 가옥을 헐었고, 도시미관을 위해 반드시 2층 이상으로 집을 짓게 했는데, 경제력이 약한 조선인들은 2층으로 집을 짓지 못해 일본인에게 집을 팔고 쫓겨난다는 내용이다. 연희전문학교의 이순탁 교수는 신문 기고에서 “경성인가 게이조인가?”라면서 경성의 많은 지역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상황을 한탄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거처, 즉 한옥집단지구를 개발하는 조선인 디벨로퍼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북촌은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밀집한,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목조주택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됐을지 모른다.

이 지역의 한옥은 20세기에 등장한 일종의 ‘퓨전 한옥’으로 전통적인 한옥과 달라 건축학적인 의미는 적을 수 있다. 그러나 한옥집단지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20세기 전반의 서울은 경성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한 도시 ‘게이조’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북촌과 익선동 일대의 한옥집단지구는 조선인의 ‘민족 주거권’을 지켜낸 셈이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